15시간의 비행이 힘든걸까, 아님 버스가 힘든걸까? 나는 버스가 더 힘들었다고 장담하련다. 야간버스는 와이파이도 되고 화장실도 있고 영화도 볼 수 있어서 처음엔 신기했지만, 가면 갈 수록 답답함이 증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많이 덜컹거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의자를 뒤로 기울이는 것이 한정적이어서 그런지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10시간 쯤 달렸을까. 러시아->라트비아 국경에서 출입국 심사를 했다. 출국 한 번, 입국 한 번 따로 할 줄 알았는데 출국심사만 짐검사와 짧은 인터뷰를 했고, 입국은 그냥 여권만 쭉 걷고 도장 찍어주고 끝이었다. 특정 국가 사람들만 내려서 짐검사를 잠깐 했다. 러시아 출입국종이를 여권 보여줄 때 안줘서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영어가 되는 직원을 부르러 간 사이 내가 그 종이를 찾았고, 직원은 '너 장난하냐?' 하는 제스쳐를 해서 심히 미안했다.
해가 서서히 들면서 라트비아 시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도 그랬듯 동트면 잠이 몰려오던 습관이 발동되었으나, 핸드폰 유심칩을 갈아야해서 흔들리는 버스에서 초집중하느라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게다가 한국에서 괜히 데이터로밍차단을 해놓고 간 바람에 공항에서 사간 유럽 쓰리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다행히 와이파이로 카톡상담을 했고 잠시 아이폰에 옮겨서 이용했다. 불안불안. 이래가지고 숙소까지 찾아가겠어? 했지만 묵을 숙소를 북마크해놓고 GPS 만 잘 쓰니까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근처 건물에서 맴돌다 물어물어 갔지만.
라트비아의 첫 인상은 뭐랄까. 미소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뭔가 물어보면 정성을 다해 알려주려는 친절함을 느꼈다. 첫 숙소의 분위기도 딱 그렇다. 헬로우~가 아니라 헬러우우~ 로 시작된 인사. 젊고 따뜻한 이미지의 직원이 아늑한 게하 공간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정말 그냥 쭉 설명하는게 아니라 '소개'를 해주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 다정함. 아.. 긴장했던 정신이 이런 환대에 스르르 허리띠를 풀어헤치는 것 같았다.
공간의 분위기가 이래선지, 여기 묵는 사람들의 공기도 따뜻했던 것 같다. 안녕 어디서 왔니라고 쉽게 말 붙일 수 있었다. 첫날은 혼자 미술관을 다녀왔지만 밤에 인도인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이 친구와 라트비아 리가에서의 두번째 날을 완전히 꽉꽉 채울 수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빗속에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려서 답답했지만,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에 화를 낼 순 없었다. 우리는 박물관과 성, 성당 등을 누볐다. 다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숙소 주변에 관광지가 다 있어서 버스는 한번만 탔던 것 같다. 밤에 한 번 더 나와서 밤거리를 걸었다. 그가 봐둔 작은 콘서트 같은 것을 보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숙소를 계획 없이 둘러보는 것도 꽤나 훌륭했다. '이러고 그냥 걷는 것도 좋지 않아?' 라고 서로 확인하는 순간, 좋은 친구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며칠 더 묵는 휴가 중이었고 나는 그 다음날 떠나기로 했다. 느긋하게 일어나 센트럴마켓에 갔다가 수영장을 다녀오는 것만이 이 날의 계획이었다. 체크아웃을 했기에 거실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그 친구와 작별인사를 두어번이나 했다. 인스타그램을 공유하고 수영장은 잘 다녀왔냐고 묻고. 결국 우리는 건물 엘레베이터에서 최종적으로 한번 더 포옹을 하며 작별을 했다. 새벽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에 10시쯤 근처 KFC로 피신했다.
KFC 에서 어떤 거지가 '너 여유있는 사람이니까 너 먹고 있는거 나한테 주라'고 한다. 손에는 알 수 없는 수포 같은게 나있었다. 보다시피 나도 돈 없이 이동 중이야. 이건 내 늦은 저녁이라구. 하면서 내 커다란 짐들을 가리켰다. 몸을 가까이 하면서 협박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는 자주 출몰하는 거지였나보다. 직원이 곧 와서 나가라고 뭐라뭐라 한다. 거지는 잠시 안보였다가 다시 와서 다른 일행에게 구걸한다. 후. 오래 있을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아까 출력해놓은 티켓을 확인해본다.
아뿔싸. 나는 여기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00시를 넘어가는 것을 생각하고 티켓을 끊었어야 했는데. 티켓은 그날 새벽 것이었다. 하루를 일찍 예약 잡았다는 것을 뒤늦게 안 나는 자리를 황급히 정리하고 버스 터미널로 병정처럼 걸어갔다. 너무 당황해서 추운 줄도 모르고 갔다. 도착하니 리가버스터미널은 셔터가 닫히는 분위기였다. 단 하나 열어놓은 창구에 가서 상황을 설명했지만, 얼른 티켓을 다시 끊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이 터미널에 자정이 넘도록 있으려면 전자티켓이라도 경비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환불은 물 건너갔고, 5분을 남기고 에코라인 사이트에 들어가 핸드폰으로 결제를 했다. 그렇게 2시간을 할 일 없이 터미널에서 보냈다. 나는 바보야 하면서.
사실 새벽 버스값이 좀더 싸기에 시간을 그렇게 잡은 건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아. 이런 바보같은 짓을 아직도 하는 구나 싶었다. 러시아에 비해서 너무나 안락했던 탓인건지 아니면 아직 정신머리가 덜 든 건지, 이런 기본적인 것으로 돈을 날리다니. 한참을 혼자서 자책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이고 나야.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란드 - 혼자 헤매기 (0) | 2019.12.13 |
---|---|
리투아니아 - 카우나스 (0) | 2019.12.05 |
리투아니아 - 빌니우스 (0) | 2019.12.05 |
문제투성이 첫 여행지 - 러시아 모스크바 (0) | 2019.11.30 |
첫 글 (0) | 2019.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