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를 조금 벗어나 진짜 루마니아를 보고 싶다면 우리집으로 와. 환영할게."
루마니아로 넘어가기 전, 카우치서핑에 내 여행계획을 퍼블릭으로 올려보았다. 1~2명에게 개인메세지로 지원을 했으나 워낙 클루즈나포카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도시여선지 모두 거절되었다. 그렇다고 성향 타입 따지지 않고 아무나에게 복사 붙여넣기하여 성의 없는 메세지를 뿌려 지원을 하긴 싫었다. 나도 최대한 이것저것 다 따져서 지원을 하긴 하는데(안전한가, 나랑 잘 맞을 것인가, 관심사가 비슷한가 등등) 내 눈에 괜찮은 사람이면 다른 사람 눈에도 괜찮은 사람인지라 이제 막 카우치서핑을 사용하기 시작한 나 같은 쪼무래기(호스트가 나에게 남긴 호의적인 리뷰의 갯수가 나를 증명해주는 셈)는 수락을 잘 안해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루마니아라는 동유럽 백패커 중에 '아시안 여자애'라는 희귀성을 가지고 프로필에다가 '대표 관광명소는 그닥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라고 호기롭게 적을 것을 보고 "얘다!" 하고 박수를 짝 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Siggi(이하 씨기) 48세, 남성, 반 독일인, 반 루마니아인 되시겠다. 클루즈나포카로 쓴 퍼블릭을 참고해서 안성맞춤으로 내 클루즈 여정이 끝나는 금요일부터 2박 3일을 제안해주었다. 나는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그의 프로필을 읽어보니 아시아 사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 본인이 살고 있는 투르다(Turda), 루마니아에 대한 튼튼한 자부심, 역사 및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프로필이 그렇게 긴 사람은 처음 봤다.
그는 일본, 타이완, 중국 등을 여러 차례 여행하여 거의 정복하다시피 알고있는 듯 했다. 한달에 한번 정도 부모님이 계시는 독일을 다녀오는데 갈 때마다 아시아 음식과 아시아 사회를 소개하는 새 책들을 한아름 사들고 돌아온다고 한다. 식탁 다리가 부러질 만큼 책을 쌓아놓았길래 이 많은 책을 다 읽으면 어떻게 하냐 물었더니, 독일에 또 갈 때 도로 가져가 부모님 집 자기 방에 모아둔다고 한다. 그는 고도비만인이었는데 그의 체격만큼 정보들을 빠짐없이 머리에 저장하는 사람 같았다. 엘레베이터가 없는 9층짜리 빌라에 9층에 사는 것이 애석했다. 미니버스가 생각보다 빨리 달려 그를 만나는 것도 30분 정도 빨라졌는데, 사실 늦잠을 자느라 집 청소가 덜 됬다며 잠깐 집 구경을 시켜주고 방에서 쉬라고 당부했다. 짐도 좀 풀고 쉬고 나오니 햇살을 같이 쐬자고 했고 그는 담배를, 나는 커피를 타 바깥 전경을 내려다보이며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의 기호식품을 들고 1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다. 주로 그가 말했지만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싶으니 지내는 동안 최대한 많이 알려달라고도 말했다. 그와의 수다는 사실 새벽 1시까지 이어졌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대해 얘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입담이 별로 안 좋은 나로써는 이미 저녁을 먹을 시간쯤에 벌써 하루 수다 할당치가 소진되어 엔진이 빌빌거리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첫날 저녁은 그가 루마니아 식으로 대접해주었고 각종 군것질거리도 많아 연료를 계속해서 채워가며 얘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 집을 너의 집처럼 이용해달라며 먹고 싶으면 먹고 빨래하고 싶으면 하고 노래를 틀고 싶으면 틀라고 권유해주었다. 그래서 그 모든걸 다 했다. 지금까지 열댓명을 호스트해보았는데 1주일 지낸다고 와서 1달을 지낸 사람, 백팩 가득히 식량을 주워담아간 사람 등등 별별 서퍼를 다 경험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더 지내고 싶으면 원하는 만큼 머물라고 했지만(나도 그렇고 싶었지만) 루마니아 다른 도시에서 다른 호스트와의 약속을 잡아놓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밤 11시쯤이었던가. 계속된 영어사용으로 과열이 된 머리를 식히려 "이제 나는 샤워를 할게" 했더니 말해주는 걸 깜박했다며 샤워를 하면 안 된단다. 빌라 규칙으로 밤 10시부터 아침 10시까지는 샤워 및 세탁기 사용 금지라고. 누군가의 설명에 의하면 어쩌면 공산주의 때 습관일 수도 있다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빌라 자체 설계가 방음에 취약해 정해진 규칙인 것 같았다. 그래서 얼굴만 씻고 다시 거실에 나와 수다를 이었다. 그리고 12시쯤 자려던 찰나, 보드게임을 집어와 한번 해볼래? 하는 것. 오마이갓. 그래, 달려보자. 두통으로 머리가 살짝 아파오기 시작했으나 너가 해보자는거 다 해보자. 보드게임을 그닥 좋아하지도, 해본 적도 별로 없는데 "이 게임은 너가 앞으로 갈 거의 모든 나라에서 즐겨하는 게임이야. 알아두면 유용할거야." 라는 말에 그냥 배워버렸다. 게임이름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체스 비슷한 거였다. 복도를 뜻하는 Quaridor 였나. 암튼, 그는 머리 좋은 한국인을 상대해야한다며 쉽지 않다고 생색을 내며 플레이했다. 3판을 했는데 항상 그가 갖가지 경우의 수를 알려주느라 다 연습게임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조언대로 플레이하지 않고(이미 아는 방식대로 하기 싫어함) 살짝씩 다르게 플레이했더니 '역시 똑똑한 한국인이야~' 하면서 같이 머리를 굴려주었다.
침대에 자려고 누우니 너무 피곤해서 잠들기 루틴인 트위터 깔작거리기조차 하지 못하고 금새 잠들어버렸다. 그의 많은 질문 공새와 게임으로 버리가 아팠었지만, 그만큼 얻은 루마니아에 대한 정보, 그가 소개해줄 내일의 일정이 기다려져 간만에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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