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돈이 없다. 대사관에서 받은, 아니 구매한 현금(지원 서비스이지만 어차피 수수료 내고 내 돈을 쓴 것이니)으로 재발급 신청한 카드가 수중에 들어오기까지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어쩌면 1주일 남짓 체류 후 다음 국가나 도시로 이동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2~3주나 보내야 한다니 벌써부터 지겹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3가지 정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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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돈이지만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잘 챙겨 먹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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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에 빠지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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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해하지 않을 것.
체코의 물가가 독일에 비하면 훨씬 싸긴 해도 그렇다고 엄청나게 싼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한려면 그건 내가 마트에서 장을 직접 봐서 음식을 직접 해먹을 때의 이야기다. 그래서 하루 세끼 중 한끼는 끌리는 것을 사먹고, 한끼는 요령껏 숙소 공용부엌에서 최대한 잘 해먹는 방식으로 배를 채웠다. 그렇다고 극도로 절약을 한 것은 아니다. 군것질쟁이는 각국의 과자와 초콜릿, 빵, 유제품음료가 무척 궁금했다. 그런 간식을 사먹는 사치를 부렸지만 걷다가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덥썩 사먹기보다는 참고 참아서 다른 무언가로 치환이 되거나 마트를 가서 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불행히도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로 인해서 마트조차도 문을 일찍 닫거나 아예 영업을 안하는 경우도 있어, 그런 국가적인 휴일에는 그 전날에 미리 사서 비축을 해둬야 했다. 음식점은 더욱 일찍 문을 닫으며 그나마 아시안음식점(쌀국수, 중국요리)은 이브날엔 연다던지 했는데, 25일과 1월1일 당일에는 예외없이 모두 닫기는 하더라. 이런 의미에서 조식이 숙소비에 포함되어있는 경우는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 커피, 차, 토마토, 오이, 식빵, 버터, 잼, 우유, 요거트가 기본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진수성찬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되도록 점심까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버터바른 식빵을 3~4장씩 먹어버렸다. 아침엔 그것만큼 맛있는 것도 없는 것 같고. 혹은 조식비를 따로 받는다고 쳐도 음식점에서 한끼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으므로 아깝지 않았다. 150크로나(한화 7000원 정도) 정도 했다.
출국 직전에 토마토라는 채소의 가능성을 보고 가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한국에서 자취요리를 할 때엔 양파나 감자를 작은 한 망씩 사면 항상 쉽게 무르거나 다 먹을 때까지 질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을 토마토로 대체해버리니, 된장찌개도 맛있게 끓여지고 색달라서 그런지 지겨운 경우도 없었다. 여기 현지 마트에서는 모든 채소들이 한국보다 쌌다. 토마토와 미니 라면을 사면 가져온 고추장을 넣고 괜찮은 토마토라면을 만들 수 있다. 상큼하고 얼큰한 맛에 여러번 끓여 먹고 있다.
서양여행자들은 파스타를 사서 해먹는 것 같던데 그런 노란 면보다 아무래도 나는 하얀 쌀국수가 더 입맛에 맞고 속도 편해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 약간의 변주가 필요할 땐 작은 봉지라면을 사서 들어있는 스프를 같이 녹인다.
아침을 먹고 나면 대부분의 숙박객들이 싹 빠지기 때문에 혼자 방에 조용히 남아있을 수 있다. 물론 12시쯤 되면 청소를 하는 직원들이 몰아닥치기 때문에 그 고요가 깨지지만, 한 두시간 정도는 아침햇살을 보면서 별 소리가 없는 그 상태를 즐겼다. 떠돌이에게 '자기만의 방' 따위는 없기 때문에 그 시간이 딱 나만의 시간이고 생각 정리를 하는 기회이다. 그래도 보통은 11시쯤 옷을 갈아입고 밖을 나왔다. 주로 공원이나 성당과 교회, 무슨무슨 탑, 조각상 등을 보러 다녔다. 아니면 어떤 것을 사기 위해 괜히 천천히 걷는 것이다. 초반엔 마음이 지쳐서 무조건 트램과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이젠 걸어야 시간도 잘 가고 또 그게 내 일과라고 느껴져서 좀 멀다 싶어도 걸어다녔다.
이 두 다리로 하는 관광이 더욱 즐거운 때는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멋진 풍경을 볼 떄인 것 같다. 공교롭게도 '풍경을 보러 가야지' 하고 나선 날보다, 여길 들려다 가볼까 했을때 본 풍경이 더 좋았다. 관광객들이 미친들이 몰려있지 않아서 더 맘에 들었고 조용히 풍경을 즐기는 사람, 무심한듯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여서 스며들기가 쉽다. 아마 숙소 이불 속에서만 지냈다면 우울에 빠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텐데,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이렇게 둘러보는 것은 어딘가 이 세상에 속해있다는 기분을 주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때 찍은 멋진 사진들이 많은데 얼른 사진일기장을 시작해야지.
나는 팬티 8개, 양말 6개나 가져왔으면서 매일 손빨래를 하고 있다. 원래는 팬티만 샤워하면서 빨던 나였는데, 아무래도 많이 걸어서 그럴까 겨울인데도 발에서 땀이 많이 나서 도저히 묵혀둘 수가 없다. 팬티는 되도록이면 옷걸이나 벽고리에, 양말은 숙소 창가쪽 히터에 사진과 같이 올려서 말린다. 저렇게 히터에 올려두면 걷을 때 기분이 산뜻해지는데, 바싹 말라서 포스락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팬티랑 양말만 빠는 건 아니다. 이제는 큰 봉지를 아예 하나 사서(마트봉지) 티셔츠부터 바지와 후드까지 다 빨 수 있다. 좀 귀찮고 매번 허리가 아프지만 빨고 나면 무척 뿌듯하다. 1만원 정도 비용을 들여 모아서 숙소 세탁기를 쓸 수도 있지만, 이왕 이렇게 손빨래 시작한 것 계속 하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비용도 아끼고 내 손으로 제대로 빠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얻는 해피포인트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크리스마스 전부터 해서 숙박비 지출이 엄청 커지고 있다. 내가 전 지구인의 세계적인 관광지 중 나름 심장부에 와있음을 이럴 때 깨닫는다. 8인, 10인 혼성도미토리룸이 1박에 30~40유로까지 올라버렸다. 아무리 마스터카드로 온라인결제를 하면 된다지만, 비교적 위생적이지 않을 혼성다인룸에 그런 돈을 퍼부을 생각은 없었다. 프라하를 그렇게 모르는 상태도 아니고 꼭 새해를 이 관광도시 프라하에서 보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젠, 브르노, 체스커부데요비체 같은 주변 중도시를 알아보았는데 상황이 그렇게 다르진 않았다.
어떡하지? 하루 3~4만원이면 싱글룸에서 잘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머릴 굴려보자 눈을 비비고 다시 구글맵을 켰다. 프라하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사람들이 몰릴 것 같진 않은 도시를 찾기 시작했다. 체스커부데요비체를 가기 전에 타보르(Tábor) 라는 작은 도시이름이 보이길래 막무가내로 부킹닷컴 숙박비를 찾아보았다.
이거야! 같은 30~40유로로 호텔 싱글룸에서 1월1일까지 예약이 가능한 상태! 나는 다른 도시는 더 알아보지 않고 누가 먼저 채갈까 덥석 예약을 해버렸다. 그 이하의 가격의 숙소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새해맞이 만큼은 약간의 돈을 써도 되지 않겠냐는, 스스로 부여한 공로상 같은 시간을 보내보자 결심했다. 내친 김에 플릭스버스까지 예약을 해놓는다. 비싼 돈으로 8명씩 냄새사는 방에 자면서 스트레스르 받느니, 빨리 이동하고 싶은 마음과 카드가 안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을 잠시 잊을 기회를 내게 선물했다고 보면 적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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