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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체코 - 떨어진 심장 줍고 긴축모드 시작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19. 12. 31.

  내 체크카드는 그다인스크 어딘가에(또는 버스 안에) 떨어졌겠고 프라하에 도착해서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러니까 카드가 곧 심장과도 같았다는 건데 이번엔 그나마 주워담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이 카드분실로 인해 현금 비상금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해외 경험이 많으셨던 고모부께서 여행할 땐 돈을 소분해서 짐이나 옷 곳곳에 숨겨두라고 말하곤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제서야 이렇게 배우는 건가 보다. 

  대사관에 가면 지금 내 상황에서 어떤 묘안이 있길 간절하게 바라며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사람들이 좀 있었다. 인포데스크에서 커다란 체코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웃으며 정석적인 인사를 해주었다. 안쪽에 있던 다른 직원이 키가 작은 남자 직원을 가르키며 저 분을 기다리시면 된다고 하였다. 번호표가 없어서 다른 누군가 나보다 먼저 업무를 볼까봐 노심초사해졌다. 한 30분쯤 기다려야했고 그 키 작은 직원이 온화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는 배낭여행 중이며  카드 하나는 분실, 다른 하나는 손상으로 가용할 현금이 없는 상태이며 한국으로 카드사 전화 연결이 필요하다 등등, 사실 내일 당장 뭘 사먹을 돈이 없는 생거지 상태였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경우에는 신속해외송금지원이란게 있습니다."

  신속해외송금이란, 정말 딱 나처럼 카드를 분실했거나 도난 등 불가피한 상황에 있는 해외 체류자에게 대사관에서 현금을 전달하는 제도이다. 여행 전까지 아니 살면서 단 한번도 대사관에서 도움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막상 이런 제도가 있어 이용해보니 너무나 고맙고 훌륭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분께서 모든 설명을 일정하고 온화한 톤으로 하셔서 그런지 딱히 호혜를 베푸는 느낌도, 바쁜 느낌도 없었다. 그런 태도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이용할 수 있다'는 느낌이 주어서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자세한 제도 설명은 여기 -> http://www.0404.go.kr/callcenter/overseas_remittance.jsp

  조금 복잡해보일 수는 있으나 간단히 하자면, 우선 대사관에서 내가 정말 현금지원이 필요한 상황임이 인정이 되면 필요한 금액을 사유서에 적는다. 그리고 직원 분이 한국 외교부와 연락을 한 후, 대사관 전화기로 내가 직접 영사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다시 금액을 확인하고, 그 금액을 입금할 계좌번호를 안내받는다. 입금자는 한국의 연고자가 될 수도 있고 본인이 할 수도 있기에 나는 바로 내 핸드폰 은행어플로 이체를 했다. 이체 사실이 확인되어 다시 한번 한국 외교부와 대사관 직원이 연락을 주고 받으면 끝이다. 신청한 금액을 직원분이 미국달러 현금으로 직접 나에게 주신다. 

  점심시간 때문에 나는 다시 숙소에 갔다가 다시 대사관으로 가서 위 과정을 진행했다. 과정 자체는 1시간 정도 조금 넘게 걸린 것 같다. 나는 내 두개의 카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원 분께 양해를 구해 전화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내가 쓰고 있던 유심은 국제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당시 나는 스카이프로 해외발신이 쉽다는 것을 몰랐던 때여서 오늘 남은 마지막 과제를 여기서 다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자, 일단 재발급 가능 여부! 하나비바플러스체크카드를 나도 국제배송으로 받을 수 있는가? 1800-1111에 걸어 확인했더니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거기서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고요한 분위기의 대사관에서 그럴 순 없었다. 카드 배송물을 받을 수 있는 주소가 필요했기에 내가 묵고 있는 숙소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체코어였기에 영어에 없는 스펠링은 대강 영어식으로 또박또박 불렀고, 우편번호도 필요하다고 그래서 끊었다가 숙소에 확인전화 한 후 다시 또 상담원님께 전체 주소를 말했다. 2주 정도 소요될 수 있다고. 네, 상담원님. 저는 3주까지도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 한달 걸리면 어때요, 한국만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제발 반송되지 않게끔 해주세요. 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최대한 공손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신한멀티글로벌체크카드. 전세계 각국의 고객센터 연결번호가 있고 수신자부담 번호라 이 전화를 걸 땐 대사관 직원분께 죄책감이 조금 덜 했다. 상담원님은 카드의 4자리 핀코드, 거래정지여부 등을 체크해주셨고 혹시 몰라 (러시아 ATM에서 코드입력 횟수 초과한 적이 있어서) 입력횟수 정보 초기화까지 해주셨다. "거래가 거부되었거나 거래 관련 막혀 있는 부분 없이 정상 거래 가능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카드 손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딱 예상대로 카드 물리적 손상 때문에 안 긁히는 것이었구나. 

  재발급과 카드 상태 확인을 마치고 나니, 직원분이 미국 100달러짜리 4장을 들고 나와주셨다(한화로는 54만원 정도 들었다. 아마도 부가세와 수수료 같은 것일텐데 정확히는 기억안남). 끝까지 온화한 미소로 여행 잘 하시라고 하시는데, 당분간은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의 포옹이라도 해버리고 싶었다. 나는 감사합니다 연거푸 인사를 하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숙소로 가는 트램에 올라타면서 속으로 외쳤다, 이제 이게 마지막 무임승차라구!

드디어 체코 코루나로 첫 환전. 

  숙소로 돌아오면서 100달러를 환전소에서 환전했고 마트에 들려 장도 봤다. 돈지갑을 넣는 크로스백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저 코루나 돈 한장 한장이 매우 귀하게 느껴졌다. 나머지 300달러를 각 가방에 나눠서 보관했다(드디어 올바른 방법을 택함). 재발급한 카드가 배송 오기까지는 이 400달러로 최대 3주 정도 버터야 한다. 식비, 숙소비에 주로 돈을 쓰고 박물관과 미술관 같이 관람료가 드는 것은 아예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이전 국가들에서 실컷 해서 별로 가보고 싶지도 않아서 다행이다.

  이제야 나는 어딜 구경할지, 뭘 먹어볼지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 참으로 오랜만에 편하게 누워서 생각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저녁 사먹을 돈도 없었는데. 사람에게 돈이 곧 미래고 돈이 곧 심장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꿈을 꾸고 미래를 만드는게 비교도 안될 만큼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여행 중 심장은 여러 개로 나눠 보관해야한다는 것을. 재정적 긴축모드는 시작되었으나 모든게 잘 풀릴 수 있을 거란 안도감이 식은땀으로 벌벌 떨었던 어제의 공포감을 싹 지워주는듯 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이틀을 마무리하는데, 숙소문이 덜컹덜컹한다. 오늘의 새로운 숙박객인가 본데 한참을 못 연다. 아마 잠겨있지 않은걸 모르고 열쇠를 돌린 모양이다. 여유 있는 내가 가서 열어줘야지. 캐리어를 끌고 비니를 쓴 학생이 들어온다. 자기 열쇠는 안 드는 것 같다며. 그리고 곧 우리는, "Are you korean?" 어? 어! 한국이시구나! 기분 좋은 확인을 했다. 

다음 날, 내가 체크아웃 한다고 하자 귤을 3개나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