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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체코 - 도착부터 심쿵모드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19. 12. 30.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15시간짜리 버스 이동을 해봤어서 그런지, 폴란드의 북쪽인 그다인스크에서 체코로의 12시간 이동은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큐바는 마지막날 어쩐 이유에선지 친구네 집에서 자기로 했다며 집을 온전히 나에게 맡기고 나가버려서 맘 놓고 씻고, 짐을 정리하면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출발 시각은 아침 7시. 전날 마트에서 뵤카빵과 바나나를 사왔으니 버스에서 먹으려고 산것도 챙겼다. 혹시 많이 단게 땡길까봐 편의점을 가봤으나 아직 열지 않아서 초코볼같은 건 포기해야했다.

  사실 버스터미널까지는 도보 20분에 트램 20분 거리여서 그냥 택시를 탈까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고민을 했었으나, 일단 도보 20분거리를 걸어보고 너무 늦어지면 그때 택시를 타자고 결정했다. 아무리 물가가 한국보다 싸더라도 줄일 수 있는 최대한으로 줄여놔야겠다 싶어서. 운 좋게도 새벽길이 너무 무섭지도 않았고 일출로 하늘이 열리는 풍경도 아름다워선지 문제 없이 걸었고 트램도 너무 늦지 않게 탈 수 있었다. 택시 값도 아끼고 이날은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플릭스 버스는 간단하고 깔끔해서 좋다.

  버스는 중간에 포느난, 보르츠와프 등 몇개 도시를 들렸다 가긴 했지만 그다인스크에서 출발할 때에는 승객이 나와 여남커플 뿐이었어서 조용하고 쾌적하게 출발했다. 또, 탑승할 때 영어사용자는 너 뿐이라며 승객의 의무같은 것을 기사가 따로 면대면으로 얘기해주었는데, 생각보다 젊고 잘생겼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냥 보조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서너시간에 한번씩 다른 기사와 계속 교대를 하면서 운행을 하더라. 기사를 중간에 교대하는 모습은 한국에선 본 적이 없어선지 약간의 안정감 같은 것도 들었다.

  중간에 친구 S와 톡을 길게 할 수 있었는데, 여행하면서 그림은 계속 그리고 있냐는 질문에 뜨끔해졌다.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철면피" 를 가지자는 것이 나의 첫 그림선생님(이다님)에게서 배운 태도였는데. 그게 길드로잉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나는 왜 누가볼까 창피해하고 제대로 그리기 힘들다는 자리 핑계를 하며 안 그리고 있었지. 물론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그림으로 그릴 만한 것들을 추려놓기도 했지만, 쨌든 러시아에서 2장 그린 것을 제외하면 드로잉북을 펼치지 않았던 것. 그래서 버스 안에서 할 것도 없겠다, 얼른 앞가방에서 드로잉세트를 꺼내 추려놓은 사진 중 제일 먼 사진 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도구를 꺼내 어떤 걸 먼저 선을 긋도 어떤 걸로 나중에 색을 칠하고 덮을지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릴 수 있었다. 다시 내 안의 그림세포들이 깨어나는 듯 했다. 

  버스는 독일 국경을 아슬아슬하게 접하며 고속도로가 아닌 작은 도로로도 한참을 달렸다. 이땐 내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독일에서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잠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베로니카는 문자로 작별 인사를 하면서 "너가 크리스마스를 폴란드에서 보내지 않는다니 참 안타깝지만~" 이라는 멘트를 또 썼지만, 쉥겐 무비자 체류 일수도 그렇고 다시 이동하고 싶은 내 의지도 그렇고 해서 폴란드를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켓으로 유명한 독일에서 25일을 보내고, 후에 새해맞이를 체코에서 보내야지 했던 것은 결국 비용문제 때문에 체코로 바로 결정하게 되었다. 독일에 가면 모든게 3~4배는 비싸진다는 친구의 말에 숙소값을 알아보니 정말이었다. 체코 역시 크리스마켓이 알아주는 것 같았지만, 나에게 "제일 유명한" 같은 수식어는 그다지 끌리는 말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프라하로 버스표를 끊었던 것이다.

  뵤카빵도 바나나도 다 먹고 당이 정말 많이 떨어질 때 쯤 체코 국경을 넘어왔다. 앞으로는 먹을 것을 더 많이 사가지고 타야지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면 성대한 늦은 저녁을 먹으리라 생각하면서 프라하 버스 정류장에 발을 디뎠다. 이제부터는 순조롭다. 숙소는 이미 예약을 해 놨으니 정류장에 있는 ATM 에서 체코돈을 좀 뽑아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들어간다. 그 후엔 저녁을 먹는다!

  근데. 그런데. ATM 앞에서 좌절이 시작되었다. 현금 인출이 가능한 내 단 하나의 비자카드가 지갑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지갑 속에 아직도 러시아, 라트비아 교통권과 리투아니아 버스표, 그리고 폴란드 지하철 출입권이 자릴 차지 하고 있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지금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게다가 체코는 유로가 주 통화가 아니다. 코루나로 환전하려면 남은 외화로 환전을 해야 하는데, 버스터미널의 환전소는 마침 딱 문을 닫아버렸다. 

  혹시 몰라 비자카드 하나, 마스터카드 하나 이렇게 두개를 만들어왔는데 마스터카드는 언젠가부터 긁히지 않아서 온라인으로만 쓰고 있었다. 혹시 실수로라도 읽히면 좋겠다 희망하며 마스터카드를 ATM에 넣어보지만 다 뱉어낸다. 일단 숙소에라도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죽어라 걸으면 걸을 수도 있는 거리지만) 버스표를 살 돈이 없으니 한참을 터미널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검색을 좀 해보니 체코의 버스나 트램도 폴란드와 그닥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 표를 살 수 있다는 얘긴 없었지만, 승객이 알아서 펀칭기계에 표를 넣었다 빼는 방식이니 기사와 대면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만. 이번 한번만, 교통권 검표원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길 바라며, 근데 혹시 걸리면 어떻게 얘기해야지 구구절절 멘트를 머릿속에 생각해가며 트램에 올라탔다.

  세상에 감사해라.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시비걸지 않았다. 나는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했고 일단 짐을 풀 수 있었다. 오버해서 걱정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검표원도 아닌 (아마도 아시안혐오가 있는)시민승객에게 검표를 당하는 상상까지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그리고 내가 묵은 호스텔 안에는 자체 환전소까지 있었다. 비상주머니에 쓰고 남아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며 보관 중이던 10유로를 소중하게 꺼내 체코 코루나로 환전까지 했다. 아, 오늘 저녁 식당에선 먹을 수 없겠지만 마트에서 주섬주섬 배를 채울 순 있겠구나.

  정말 딱 마트에서 간단하게 샐러드와 과일, 과자, 물 정도를 사고 나니 내일 교통비 정도는 남았던 것 같다. 울고 싶지만 울고 싶은 겨를이 없었다. 내일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빨리 계획을 세워야했다. 일단 마스터카드로 온라인결제는 되니 숙소 예약을 2일 정도 더 해버렸다. 내일이 금요일이니 은행 창구에 가서 현금 인출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앞으로의 여정도 매 현지 은행 창구 인출로 현금을 확보해서 최소 11개월을 버티면......

  그건 좀 아니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밖에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여행해야지 싶었다. 이대로 여행을 접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했다.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날 은행부터 아침 일찍 돌기 시작했다.

현금이 오고가는 캐시데스크는 몇개 없으며 보안이 철저한 편이다.

  다음 날 나는 일찍 호스텔의 조식을 먹고 주변 은행들을 돌기 시작했다. 숙박비에 조식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게다가 알차기까지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현금이 없으니 점심배까지 채우리라 하는 생각에 많이 먹고 나왔다. 시내 중심과 가까워서 걸어서 생각해둔 큰 은행들을 다 둘러 볼 수 있었는데, 문제는 체코는 현금을 주고받는 캐시데스크가 있는 지점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캐시데스크를 없앴으며(19년 4월부터 시행) 현금 인출은 ATM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게 직원들의 말이었다. 혹시나 싶어 좀 작은 은행들도 싹 다 돌았지만 현금 인출이 가능한 은행은 전무했다. 결정적으로는 내가 현지 은행 계좌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 어찌해야하나. 카드 발급 때 '창구 인출'에 대해 언급되어 있었기에 당연히 되는 줄 알았는데. 은행 정수기에서 물을 꿀꺽꿀꺽 받아 마시고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내 마스터카드는 신한글로벌멀티체크카드라고(일명 GMC) 충전식 카드인데, 재발급을 받으려면 한국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비자카드인 하나비바체크카드는 어떠한가. 엥? 해외에서 재발급을 받은 사례가 있길래 하나카드 사이트에 들어갔다. DHL 긴급배송으로 발급가능. 그렇다면 하나카드 고객센터로 전화만 걸 수 있다면 어쨌든 나는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배송이 오기까지 2주정도 걸릴 수 있고 이마저도 지금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앞두고 있어 물류가 밀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3주까지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호스텔 조식만 먹고 지낼 순 없으며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는 긴 시간이다. 그렇다. 나는 조언과 도움이 필요하며 현금이 필요했다. 무작정 주 체코 한국대사관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길 가는 한국 관광객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할 용기는 없지만, 대사관에 가서 질질 짜면서 도움을 요청할 용기는 있었다. 

  전날 딱 한번만 이라던 트램 무임승차는 횟수가 늘어버렸고 결국 뻔뻔해지고 있었다. 대신 다음에 누군가 교통비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도와줘야겠다는 장담 못할 약속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