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보르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2020년 1월 1일. 역시나 공휴일이기에 갈 곳이 없음을 예상하고 타보르에 가기 전 예약해뒀던 신년 클래식 콘서트를 다녀왔다. 정확히는 보려고 티켓값을 공연장에서 알아보다가 빡쳐서 접었다가, 타보르 숙소에서 다시 인터넷으로 고민하다가 예약한 것. 나는 왜 빡쳤었나.
체코를 떠나기 전 꼭 해야지 싶었던 것이 드보락(드보르작) 연주를 보고가자는 것이었다. 대사관에서 돈을 받고 처음 문화활동에 돈을 쓴 곳이 바로 드보락박물관이었다. 입장료가 50코루나(한화 2600원) 밖에 하지 않는 다는 리뷰를 보고 현금을 아껴야 했던 나에게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생각해서 갔었다. 드보락이 체코가 낳은 유명한 작곡가인지는 이 때 처음 알았으며, 몇 번 들어봤던 곡들도 있긴 했다. 클래식을 잘 모르고 딱히 흥미도 없는 상태에서 '드보락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귀에 잘 맞는지 보자' 하는 마음이었어서 어쩌면 복불복 심정으로 들어갔었다.
나는 이 날 드보락의 음악을 알았기에 체코 여행은 여기서 마쳐도 의미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주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박물관은 그의 생애를 짧게 정리를 해놓았고 한 층은 그의 중요 곡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규모가 작은 곳이었지만 나름 주제를 바꿔가면서 전시물을 기획하는 것 같았다. 방문했던 시기에는 '자연과 그의 음악의 관계' 같은 것이었다. 안토닌 드보락은 여행과 자연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들으면 들을 수록 뭔가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틀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관람객이 역시나(?) 많지는 않았지만 단 2개 밖에 없는 헤드폰 중 하나를 거의 30~40분 정도 혼자 차지하여(커플 관람객의 합석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진심으로 드보락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아니 클래식 음악에 빠지는 날이 오다니. 위에 링크한 곡은 Zajatá 이다. 클래식 악장 읽는 방법? 같은 걸 몰라서 그런데, 같은 곡이라도 피아노와 바이올린, 피아노와 성악 - 이런 식으로 여러 버전이 있는 것 같았다. 25개 정도의 음원을 그 자리에서 다 들어봤는데 처음엔 너무 맘에 든다며 각각의 곡을 사진을 찍었지만, 결국 다 귀에 잘 맞는 걸로 결론이 내려졌다. 뭐랄까. 카드대란의 순간 때문에 그런걸까. 그 참사 이후로 처음 느끼는 문화적 행복, 고차원적인 행복을 느끼는 거라 그런지 거의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래서. 타보르로 가기 전에 Smetana Hall 이라고 프라하의 시민회관겸 콘서트장에 들어가 티켓팅을 시도했다. 온라인으로 알아본 바로는 1월 2일 8시 공연이 내 일정상 가장 좋을 것 같았고, 쓸데없이 발레가 같이 껴있는 공연은 피하고 싶었기에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매표소 직원은 "이 공연은 프라이빗한 공연이야. 2일 4시꺼 보던가." 라고 단칼에 말했다. 프라이빗? 그게 뭔데? 그래서 나는 살 수 없다는 건가? 더듬더듬 말을 지체하다가 줄이 길어서 눈치가 보여 옆으로 비켜섰다. 가만, 프라이빗한 공연이면 예정이 된 단체관람객만 받겠다는 건가? 매표소에선 표도 안파는데 괜히 온라인으로 예매했다가 입장 불가되는 거 아니야?...... 나는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해서 다시 긴 줄을 서서 직원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다시 물을게요. 이 공연은 개인은 볼 수 없는 건가요?"
"4시꺼만 가능하다고. 플리즈- 플리즈- 플리즈-!"
눈을 크게 뜨고 양손으로 좌우로 미는 듯한 제스쳐를 하며, 말했잖냐, 줄이 길다 안 살거면 비켜라 하는 뉘앙스로 저렇게 말하니 안 꺼질 수가 없었다. 나는 궁금한게 안 풀렸는데. 온라인으로만 구매할 수 있는 건지, 아예 구매를 해도 못 보는 건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제화면까지는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아님 내가 영어를 잘 못알아 들은 건가. 다른 설명 없이 비키라는 듯한 말을 듣자 열이 확 올랐다. 무슨 티켓 설명을 저렇게만 하지. 다 이 공연장에서 열리는 콘서트인데 '프라이빗'이 뭔지 설명을 해주던가. 무조건 그 전 공연 티켓만 살 수 있다니 무슨 말이야 대체.
생각하면 할 수록 무시당한 느낌이 들어서 가격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좆팔 콘서트 여기에서만 열리냐? 슬로바키아 가서 볼거다' 하면서 씩씩거렸다. 직원이 알아들을리 없는 한국어로 욕을 한 바가지 하고 나올걸 후회도 됐다. 워낙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좌석이 항상 잘 팔리니까 서비스같은게 발달할 리 없는 거다. 내 행색이 추레해서 더 무시당한 것도 있을 거고.
그래서 타보르에서 중요하게 했던 것은 다음 여정지인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드보락 연주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으며, 1월 9일에 3만원 아래로 제일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프라하의 스메타나홀이나, 드보락홀을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특히 체코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몰린다는 걸 간과할 수 없었다. 클래식 연주의 고저를 평가하는 예민한 귀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 이왕 드보락에 눈을 아니 귀를 뜬 것 체코에서 콘서트를 안 보고 가자니 너무 아쉬운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으로 아예 더 웅장하다는 드보락홀의 드보락 연주를 찾아보았다.
최소 5만원으로 시작하는 드보락홀. 시간대는 딱 괜찮은게 있었으나 제일 별로인 좌석을 5만원씩이나 내고 갈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스메타나홀로 알아보았다. 발레가 껴있다. 1월 1일이다. 프라하로 돌아가는 버스를 취소하고 기차를 알아봐야 한다. 결국 매표소직원에게 악감정이 들어서 '거기서 보나봐라' 했던 곳으로 예매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버스 취소에 수수료가 붙지 않았고 기차도 자주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프라하는 이제 지도를 조금만 보고 걸어도 숙소까지 걸어갈 수 있었고, 짐을 풀고 여유롭게 또 걸어서 스메타나홀로 갔다. 이때는 타보르에서 여독을 많이 풀어선지 그 직원에 대한 악감정은 많이 생각나지 않았다. 스메타나홀에서는 제일 안 좋은 자리 아닌 두번째로 안 좋은 자리로 예매해놓았다. 5만원을 쓰는 것보단 조금 작은 홀에서 조금 괜찮은 자리에서 보는게 낫겠지 하면서.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홀이 무지막지하게 큰게 아니었기에 너무 뒷자리도 아니었고 소리도 괜찮게 들렸다. 모짜르트 곡으로 콘서트가 시작되었고 중간에 드보락 곡 4개, 마지막으로 스트라우스 곡 4개로 마무리 되었다. 드보락의 곡은 Slavonic Dances no 10 으로 시작되었는데, 첫 선율을 듣자마자 이상하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버렸다. 안 그래도 이상하게 모짜르트 곡때부터 뭔가 울렁울렁 했던 것이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멈출 수가 없어서 중간에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서 찍어내야 했다. 이때 갑자기 직원에게 무시 받은 것도 생각나고 카드분실사건도 생각나면서 이렇게 체코를 마무리하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태어나서 처음 듣는 제일 좋은 악기로 연주되는 제일 좋아하는 곡들이 귀에 들어오는데 '너무 아름다워!'...이런 복잡스런게 섞여 눈물이 난 것 같다.
또 이런 것도 있었다. 이런 좋은걸 왜 진작 향유하지 못하고 살았는가? 물론 체코 물가니까 4만원 선에서 들을 수 있었지 예술의전당 같은 데서 듣는다고 생각하면 음, 좀 비싸긴 하다. 하지만, 왜 내 인생 전반에 있어 좋은 악기로 된 수준 높은 연주를 듣는 일이 왜 없었는가? 하면서 지난 세월을 마구 되짚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아무도, 클래식 콘서트를 데려간 어른이 없었으며 공교육 속에 그런 기회가 없었는지. 내가 산 인생이 30년인데 이런 연주를 듣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특히, 왜 우리 가족은 어쩌다 한번쯤이라도 좋은 것을 향유하는 것에 대해 돈지랄이라고 생각하며 멀리하고 살았나...(가족 얘기는 길어질 수 있으므로 여기서 생략하자)
드보락 때문이 아니더라도 악기들의 소리는 또 얼마나 예쁘던지. 바이올린, 플룻, 첼로, 트럼펫, 피아노, 클라리넷... 씨디로 mp3 로만 들었던 소리보다 천배쯤 아름다운 소리들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소름이 듣고 감성에 푹 젖게 만드는. 소리 그 자체에 몸을 맡기게 되는 조화.
연주는 요한스트라우스의 radetzky march(라데츠키 행진곡) 으로 경쾌하게 마무리되었다. 지휘자는 관중에게 박자에 맞춰 박수를 유도해내고, 꼬마 발레리나와 여남 발레리나들이 폴짝폴짝 뛰면서 인사하러 다시 나왔다 사라졌다. 신나는 곡으로 끝나서 망정이지, 서정적인 멜로디로 끝났다면 나 혼자 얼마나 또 궁상맞게 훌쩍거리면서 코에 휴지를 박고 나왔을지 상상만해도 창피하다. 누가보면 쟤 클래식콘서트 처음보는 미개한 나라의 동양인이네 했겠지. 아 근데 맞는데 어떡해.
체코에서의 커다란 수확, 드보락 선생님. 당신이 숲 속에서 새를 길들이고 냇물의 졸졸거림을 관찰하며 쓴 곡들이 오늘날 나를 행복하게 하는구만요. 나쁜 일들일랑 오래 생각하지 않고 좋은 일들만 한아름 안고 갑니더이. 그렇게 프라하에서 3일을 더 묵고 드디어. 체코를 떠나 슬로바키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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