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를 떠나는 건 마치 어려운 챕터 하나를 끝내는 기분이었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열차는 이전에도 여러 번 들렸었던 프라하 기차역에서 탈 수 있었다. 승강장 번호가 너무 늦게 떴고 15분 정도 지연되는 바람에 뭔 일이 또 나는거 아니야? 하는 발목 잡힐 것 같은 불안이 잠깐 있었지만 기차는 아무 문제 없이 출발했다. 2등석을 끊었는데 6자리씩 한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따로 문을 닫을 수도 있고 온도와 조명, 방송음량까지 조절하는 레버가 있어 2등석 치고는 굉장히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간단하고 직관적인 이런 설계가 맘에 든다.
4시간 동안 거의 혼자 한칸을 다 차지하며 매우 평화롭게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듯이 "여기는 브라티슬라바역입니다." 하는 방송 하나 없었어서 나는 사람들이 출구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걸 보고서야 주섬주섬 가방들을 챙겨 따라 내렸다. 예약해둔 숙소는 기차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기차역에서 환전을 하러 갈 필요는 없었다. 다만 숙소에서 락커키 보증금을 내야했기에 숙소 주변 ATM 에서 유로를 좀 뽑아야했다. 라트비아와 리투비아 이후로 참 오랜만에 만져보는 유로였다. 지갑의 작은 주머니에 잠들어있던 5유로 정도와 환전하려고 같이 넣어둔 100미달러가 생각났다. 이따가 아니면 내일 환전을 하러 가야지.
기차 안에서 바나나와 도넛 두개, 귤까지 먹으면서 왔지만 배가 고픈건 어쩔 수 없었다. 미리 검색해둔 몇 개의 음식점 중 다뉴브강가로 가는 길에 있으면서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 이른 저녁을 먹었다. 겨자소스와 치킨플렛, 계란후라이, 오이고추피클, 소량의 양파볶음은 처음 보는 조합이었지만 간단하고 적당했다. 소나 돼지고기를 제외한 재료 중에서 내가 먹을 수 있고 좋아하는 재료들의 합이기도 했고, 바로 조리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따뜻하고 풍부한 맛이었다. 커피와 함께 총합 1만원이 안되는 식사였지만 나름 분위기가 있는 식당이었다. 굉장히 어두운 조명 아래 쉴새 없이 쪽쪽거리는 커플이 한 테이블, 조용히 식사하는 가족 한 테이블, 덜 쪽쪽거리는 커플 한 테이블. 의자는 이대로 계속 써도 되는 것인가 의아해보이도록 낡아 식당의 연식을 가늠해보게 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자 어둠이 완전히 깔리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경치를 보려고 걸어간 다뉴브강은 생각했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분위기고 뭐고 일단 어둡고 비가 내리니 빨리 숙소를 가야했다. 환전소는 찾을 수 없었고 길가에 도로에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벌써 모든게 문을 닫아버린 분위기였다. 돌아가는 길은 춥기도해서 버스를 타고 싶었으나 중간에 마트를 들려야 했기에 계속 다시 걸었다.
저기 새 건물에 계속 애용해오던 BILLA 가 보인다. 모든게 다 닫은 것 같았지만 마트만큼은 불빛이 환했다. 바나나와 귤, 내일 아침에 먹을 도넛을 고르고 커피쪽으로 가본다. 커피 값을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지고 다닐 커피 파우더가 없을까 계속 찾아봤지만 항상 크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여기에 딱 알맞는 작은 사이즈의 커피를 판다. 그래서 2~3개 중에 고민하다가 슬로바키아 자국 브랜드 것으로 골랐다. 이름도 Extra 가 붙어있으니 맛이 조금 낫겠지 하면서. 동유럽 전반적으로 커피값이 매우 싸며, 슬로바키아는 체코보다 쪼금 더 싼 것 같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침에는 꼭 커피한잔이 필요하니 그때마다 밖에서 사오는 것도 좀 귀찮았고 3000원 정도씩 솔찬히 돈이 나가고 있었다. 이제 숙소 키친에 커피포트와 컵만 있으면 언제든 아메리카노를 만들 수 있다!
출국 전에 룸메가 그랬었다. 한국에서 너가 좋아하는 커피 갈아서 가는게 어떻겠냐고. 그 말에 외국 가면 맛있는 커피 더 많을 거고 커피 내리는 도구(최소한 티백)를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은 짐만 될 뿐이라고 답했는데. 룸메의 말이 합리적이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몇몇 숙소는 키친에 커피 가루를 아예 제공해주고 있었는데, 뜨거운 물을 붓고 가루들이 가라앉기를 1분 정도 기다렸다가 마시면 되는 타입이었다. 마트에서 작은 봉지나 내가 산 저런 직육면체 제품도 다 그런 커피들이다. 일명 터키식커피. 한국에서 갈아왔다면 아침 커피를 향한 나의 수고가 조금 늦게 시작되었을거다.
1월 6일 월요일은 슬로바키아의 건국기념일이라 또 많은 곳이 문을 닫는다는 숙소 직원의 조언이 떠올라 이튿날인 일요일엔 프리워킹투어에 나갔다. 이미 광장에 외국인밖에 없어보였지만 어제보단 날이 밝아 기분이 좋았다. 날이 꽤 추워져 계속 오들오들 떨었지만 접경 국가인 체코, 폴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비해 매우 조용한 이곳에 대해 최대한 열심히 설명하려고 하는 가이드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비교적 소규모 그룹이 꾸려졌지만 참여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출신들이었다. 대부분은 주변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처음으로 가이드가 구성원들이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한 경우라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한국에 가봤다던 어떤 미국인 커플과 말을 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을 좋아해 한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서울 보다는 광주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던데,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거주처를 이따금씩 옮기는 건 어떤 삶일까 매우 궁금하고 부러운 커플이었다.
유명한 프라함의 봄 사진이 찍힌 건물 앞에서 투어가 끝났다. 나는 다음 날은 국경일이기 때문에 꼼짝없이 숙소에 있어야겠다 생각했기 때문에, 가이드가 추천해준 음식을 점심으로 먹고 나서는 브라티슬라바성을 올라야겠다고 급히 결정했다. 추워서 얼른 숙소로 돌아가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그건 내일 하루종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오늘 좀 돌아다녀야 했다.
슬로바키아는 굉장히 신생국가이다.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한지 30년 정도 되었을 뿐이다. 건물들은 방문했던 어떤 국가의 것들보다 새것이었고 말끔하다. 동네를 조금 돌아다니다보면 웅장하게 올리고 있는 새 건물들도 서너개 발견할 수 있었다. 유럽연합에 등록하면서 통화를 유로로 전환하면서 물가가 굉장히 많이 뛰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렴한 편이며, 실업률은 2~5%정도로 낮은 편이며 누구든 일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고용이 안정적이라고 한다. 사람들 모두 친절하고 식당의 직원, 카페의 서버들 모두 서두르지 않고 웃어주고 깔끔하게 일하는 것 같았다. 저 수프를 먹은 바겸 식당의 나를 담당한 직원은 약간 집시같은 외모였는데, 천천히 걸으면서 이 테이블 저 테이블 계속 관찰하면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음식을 날랐다. 외국인데도 이국적인 느낌이 풍겨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내가 처음 주문하려고 했던 큰 갈릭수프가 소진되었다고 말할 때는 정말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해주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 먹고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타야했다. 처음으로 버스티켓을 끊는 것이라 한참 검색을 해보고 티켓머신 앞으로 갔다. 내가 살 티켓은 15분짜리로 0.7유로짜리였다. 1유로를 집기 위해 지갑을 꺼냈다가 아까 지퍼를 닫지 않았어서인지 속에 있던 동전들이 와장창 바닥에 떨어졌다. 살짝 진땀이 났다. 지폐가 바람에 날리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티켓을 뽑고나서 알았다. 정류장을 잘못 왔네. 지하보도로 이동을 해야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로바키아 -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것들을 찾아서 (0) | 2020.01.16 |
---|---|
슬로바키아 - 아......브라티슬라바성이여 (0) | 2020.01.14 |
체코 - 신년 클래식 콘서트 보고 좋은 기억만 가져가기 (0) | 2020.01.12 |
체코 - 타보르엔 왜 갔습니까? (0) | 2020.01.08 |
체코 - 태산 같았던 걱정이 스스로 녹았네 (0) | 2020.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