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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슬로바키아 -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것들을 찾아서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20. 1. 16.

  제목을 저렇게 지으니 우울증을 지속적으로 겪은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오감을 다시 일깨우려고 움직인 것 같아 좀 과장한 느낌이 들지만, 부분적으로는 맞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가진 디폴트 우울감이란 정혈로 인한 아주 규칙적인 감정변화가 있는데, 여행을 하면서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일들 포함)들이 중간에 잊을만 하면 한번씩 생겨서 그 어느때보다 더 잦은 일희일비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좀 잦아든다면 이 여행이 덜 불안해질것 같다.

  사실 대사관 직원과 몇번의 통화를 하고 메일로 '습득물 보관하게 될 시 무기한 보관 가능' 이라는 결론을 보게되니 꼭 찾겠다하는 미련은 접게 되었다. 누가 소매치기든 분실이든 잠깐이면 떠날 외국인의 돈을 안 만지겠는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나 적극적이지 않은 경찰의 대응 때문에 슬로바키아경찰서를 파괴하고 싶다라는 분노가 있을 뿐, 이 상황을 빨리 수용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한다. 건국기념일 다음날은 모든 곳이 다시 활력을 얻은 듯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날씨 역시 쨍해서 내 기분도 따땃하게 데우기 좋았다. 

 

다음 아침을 위한 장보기

줄기째로 놓인 토마토들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것인데 여행 중 꽤 흥미로운 순간은 그 나라의 마트를 둘러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폴란드에 있는 마트가 체코에도 있고 그게 슬로바키아에서도 보이고, 아무튼 유럽 내 글로벌 기업은 참 많은 것 같은데 이 날 천천히 둘러본 곳은 여기에만 있는 유기농, 친환경 컨셉의 마트였던 것 같다. 가격이 BILLA 보다 좀 나가는 편이었지만 비건이나 오가닉 제품들이 좀 더 눈에 띄게 배치되어있고 그게 주류인 느낌이었다. 마트 입구에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도 있고 아침식사용 요거트 제품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그저께 사실 점찍어둔 토마토페스토 빵을 샀으며, 맛있는 빵이나 도넛은 저녁이 되기 전에 방문해야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싱싱한 생물을 구매하는 주부의 느낌으로 '요거 하나 주세요' 했다. 베이커리 직원들의 얼굴과 영업미소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경험을 한 것은 덤이다(가본 나라들 중에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가장 미남미녀가 많은 것 같다).

식재료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샴푸나 세제 같은 것을 필요한 만큼 짜가게 만든 듯. 아마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고 그런게 아닐까.

  사진에서 뿐만 아니라 원두 판매쪽에서는 아예 집으로 갈아갈 수 있게 큰 분쇄기가 있었고, 채소나 과일들은 흙이나 끈적임 때문에 봉투를 따로 담을 필요 없이 깨끗하게 정리가 된 모습이었다. 나는 여기서 양파와 파, 맥주안주로 먹을 과자를 샀는데 사놓고 나서 보니 일반 마트와 가격차이가 거의 없었고, 심지어 모두 유기농 출신인 것을 깨달았다. 마트의 규모는 올드타운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규모도 꽤 크다. 비건되기, 유기농먹기 너무 쉽다.

 

번듯한 식사를 해보다

  관광지에서 소매치기도 당해보고 해볼 건 다 해봤다는 생각에(사실 브라티슬라바는 하루이틀이면 다 볼 수 있는 소도시이다), 성 근처 '매직미러방' 같은게 있다고 해서 거길 가는 길에 점심을 먹었다. 시간대는 점심을 살짝 빗나간 시간이라 테이블이 넉넉했다. 비건메뉴였던 토마토버섯리조또를 시켰고 와인 값이 비싸지 않길래 화이트와인을 한 잔 시켜보았다. 혼자서 와인이라니! 한국에선 절대 하지 않을 주문이었고, 또 그런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돈을 다시 뽑아 현금이 아주 넉넉하니 어제와 전혀 다른 바이브로 돈을 쓴다. 

4천원의 사치

  "여러분은 사실 슬로바키아 와인을 사보지 못했을 거에요. 특히 화이트 와인은요. 굉장히 맛있지만 생산량은 적고 슬로바키아인들이 다 마셔버린답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화이트와인을 좋아해서 수입량이 더 많아요." 했던 워킹투어가이드의 말이 떠올라 시켜본 것. 나는 비건 리조또를 시켰는데 둘다 매우 훌륭했다. 리조또는 토마토와 버섯, 그리고 올리브유랑 올리브 같지만 요상한 열매(카프레스? 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남)가 듬뿍 들어있어 식감도 맛도 여러가지로 풍부했다. 화이트와인은 와인 자체를 별로 마셔보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오? 괜찮은데? 할 정도의 맛이었다. 특히 리조또랑 잘 어울려서 이게 바로 약주의 맛인가, 이래서 반주를 하는 것인가 처음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가격 때문에 갈 수 없는 수준의 레스토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술까지 걸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나는 Multium 이라는 전시관으로 걸어갔다. 위치는 브라티슬라바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잠깐 위쪽을 째려보았지만 가는 길이 예뻐 기어오르려는 분노를 누를 수 있었다.

교회에 붙어있는 성벽은 반쯤 잘린 것 같아 살짝 아쉬웠다.

  

이상하지만 힐링된 곳

묘하게 힐링되는 복제의 기운

  몇 명의 아티스트들이 일본의 어떤 전시에 영감을 받아 이 공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쩐지 들어가자 마자 아로마 향기와 아시아틱한 배경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거울의 복제성이 주는 느낌과 힐링 효과를 극대화하는 여섯개의 거울 방이 다였지만, 거울을 밟고 서거나 앉는 것을 허용해 준다면 한 없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 신기했다. 어찌보면 입장료가 매우 아까운 별 것 없는 공간들이지만 그 아무것도 없고 끝없이 같은 이미지가 펼쳐져있다는 그것이 포인트이다. 

  거울을 2개, 4개, 6개.... 이렇게 계속 맞대다 보면 이미지가 더 입체적으로 복제된다. 그래서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방은 아예 우주를 컨셉으로 해서 우주 한가운데에 멀뚱히 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사진의 서랍방과 함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무서울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높이감 때문에 더 힐링이 된 것 같았다. 직원에게 방의 디자인이 정기적으로 바뀌냐고 묻자 개관한지 2년 정도 밖에 안되서 아직 그렇지는 않다고는 하던데, 여러 디자인이 계속 나오면 좀 더 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커피 잘 하는 곳, , 월남쌈 잘 하는 곳

이것은 무려 오트밀라떼. 설탕을 담은 유리병 센스 좀 봐.

  숙소에서 25분 정도 열심히 걸어가니 커피를 아주 잘 한다고 구글맵 평이 좋은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워서 좀 혼났지만 걸어간 보람이 있었다. 아니, 슬로바키아가 커피를 잘하는 나라인가? 물론 잘 한다는 곳에 온 거지만 마트에서 산 커피도 그렇고 처음 온날 마신 비엔나 커피도 그렇고, 많이 마음에 든다. 바리스타분 혼자서 일하고 있고 2인좌석 2개, 스탠딩 바가 짧게 배치된 작은 카페였는데, 손님이 간간히 계속 들어왔다. 사람들이 좀 빠지고 나니 바리스타가 창고에서 개를 풀어놨는데 불독믹스인 것 같던 개는 한참을 바닥을 킁킁거리고 어딘가를 핥고(아마 사람들이 흘린 커피겠지), 손님이 오면 맹렬히 꼬릴 쳤다. 몇 번 만져주니 내가 맘에 들었는지 아주 당연하단 듯이 허벅지에 쿵 하고 올라와 안착했다. 

  사진엔 작게 나왔는데(더 큰데 억울하네) 다리가 짧고 몸이 육중한 스타일이었다. 숨쉬기가 좀 벅찼지만 동물과 친해지는 것은 항상 영광이라고 생각하기에 바리스타분이 미안,, 알유 오케이? 했을 때 슈어슈어 해버렸다. 

내가... 좋니?

  한참을 앉아서 내 손길을 즐겼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좋던지. 날 쓰다듬어! 계속해! 하면 동물러버는 그냥 계속 이뻐해줄 수 밖에 없다. 나는 처음 시킨 오트밀라떼가 맘에 들어 나가면서 한잔을 더 시켰다. 일반 우유버전으로 마시니 더 맛있었다. 최고의 라떼다. 개를 내려놓고 나가면서 "너무 맘에 들어요! 행복해요." 라고 고백하며 나왔다. 음. 나를 확실히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좋은 커피와 동물인 것이야.

  숙소로 돌아가는 길, 커피를 두잔이나 마셨지만 다음 여정지인 헝가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또 3시간 정도 공복일테니 저녁을 먹어놔야겠다 싶었다. 유로도 조금 쓸 겸 숙소가는 길에 베트남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국물보다는 채소를 와삭와삭 씹고 싶어서 스프링롤(월남쌈)을 시켰는데.

이렇게 클 줄이야. 하지만 다 먹음.

  이것은 완벽한 채소의 향연이었다. 롤이 4개가 나왔는데 길이가 18cm, 지름은 4cm 정도 되서 베어물 때 마다 입을 쩍쩍 벌려야 했다. 왜 베트남맛집이 슬로바키아에 있는거지? 여행 시작한 이후로 채소가 먹고 싶거나 돈을 아끼고 싶을 때마다 들려서 일주일에 2~3번은 아시안음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지만 여기서 먹은 요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숙주니 오이니 고수, 당근과 땅콩이 꽉꽉 채워져 있어 완벽한 풀파티였다. 2개만 여기서 먹고 2개는 헝가리 숙소가서 먹게 포장해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다 먹었는데, 정말 든든하고 만족스러운 월남쌈이다. 사진의 왼쪽은 달콤짭짤한 소스인데 그릇이 따뜻하길래 처음에 '와 목 메이지 말라고 쌀국수 국물을 주셨구나' 하고 한 모금 호로록한 것은 창피했지만 사실이다.

 

  이렇게 슬로바키아를 비오는 다뉴브강가 ~ 지갑 소매치기 ~ 먹부림 으로 마무리했다. 슬로바키아는 관광객이 미치도록 붐비지 않는 도시여서 그런지, 나처럼 액티브한 이벤트가 없어도 소소한 일상을 꾸리는게 더 중요한 사람에겐 한 없이 매력적인 곳이 분명하다. 전반적인 시민 의식 수준이 좋은 곳이다. 이 나라의 다른 도시인 코시체도 가보고 싶었지만 경로 방향이 소모적이어서(부다페스트로 들어가긴 너무 오른쪽임) 멀지 않은 미래에 가보기로 예약을 걸어본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슬링백을 가슴쪽으로 타이트하게 매고 지갑을 항상 몸에 지닌채, 그리고 더이상 처지는 기분은 한동안 허락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헝가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