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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헝가리 - 천천히 구석구석 가보기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20. 1. 19.

  부다페스트에서의 시간은 6일 정도를 할애해 놓은 상황이었는데 참 적당했다고 본다. 3일씩 딱 두곳의 호스텔에서만 지냈고 두번째 호스텔은 키친 및 공용공간이 상당히 잘 되어있어서 간간히 다른 게스트와 인사도 나누고 노트북을 켜놓고 일기도 많이 쓸 수 있었다. 그런 공간이 있으면 나만의 리듬을 가지려는 본능 같은게 생기는 것 같다. 밀린 일기를 쓰고 언제 영원히 잠들지 모르는 핸드폰의 상태를 걱정하고, 중장기적인 여행의 그림을 고민하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걱정하고,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서 뭘 할 거고 어떻게 살 건지 등등 산적한 걱정들을 풀어놓을 시간을 갖지 않으면 답답해진다. 가끔이지만 친구가 챙겨줬던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볼 때면 참 행복해지는데, 아무튼 이런 시간들이 여행 중이라고 해서 뒤로 한 없이 밀려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저 벽에 걸린 아이비는 진짜 아이비다. 오른쪽 끝 테이블은 거의 내 지정석.

  이 괜찮은 호스텔에 와서는 위치가 조금 더 좋아져 하루 일정이 2개라고 하면 1개를 마치고 잠시 돌아와 몸을 녹이거나 점심을 해먹고 다시 나가는, 이런 루틴도 가능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루는 워킹투어를 듣고 돌아와 몸을 잠시 녹인 다음 지하철을 타고 미술관을 다녀왔고, 다른 하루는 아침에 유대인박물관을 보고 와서 쉬었다가 저녁에는 야경을 보러 부다성에 갔다. 

워킹투어때 간 부다지역, 어부의 요새와 함께 있는 마차슈 성당.

  왜 내가 워킹투어 듣는 날은 날씨가 이렇게 안 좋은가. 생각해보니 맑거나 따뜻했던 적이 없이 항상 다른 날 보다 더 춥고 흐렸던 것 같다. 뭔가 걸칠 걸, 뭐 하나라도 더 두를 걸 하는 후회가 반복되어서 이번에는 데카트론에서 산 큰 비치타올을 숄처럼 어깨에 길게 접어 둘렀더니 좀 나았다. 하지만 비가 살짝 뿌리기 시작하자 어림 없었다. 발은 곧 얼어버릴 것 같았고 투어는 2시간 반을 꽉 채워 진행됬다. 투어를 들으면서 기억에 남았던 것은 헝가리 세라믹에 대한 것이었다. 마차슈 성당 사진에도 보면 지붕 쪽만 색감이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수한 제조기법 때문인지 아니면 재료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체 정화 성질이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깨끗한 색감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회의사당 지붕도 그렇고 그런 세라믹을 이용해 꾸민 건물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 이 두 지역이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양 옆에 위치한 도시인데, 부다 지역이 더 부촌인지, 부다 사람들이 페스트 사람들을 '부다로 이사오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라고 여기는 밈이 있다고 한다. 마치 강남과 강북 수준을 따지는 것 같은 건가, 하고 서울인은 바로 이해했다. 강이 지역을 구분하면서 그런 삶의 질 차이가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 역사로 인해 분류가 되는 경우도 많겠는데, 폴란드의 바르샤바도 비스와 강을 사이로 위쪽에 위치한 프라가지역이 가난한 동네가 된 것처럼. 물론 페스트 지역은 완전한 관광도시로 성격이 다른 경우인 것 같지만.

유명한 체인브릿지에서 살짝만 내려와도 풍경이 확 트이는 다뉴브강.

  워킹투어 다음날은 얄밉게도 날씨가 화창해져서 다뉴브강가를 꽤 걸었다. 이때가 부다페스트에 있는 동안 가장 맑은 날이어서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한동안 멀리 시선을 두고 멍을 때릴 수 있었다. 체인브릿지쪽은 항상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다리 자체도 좁은데, 이렇게 조금만 빗겨도 마치 같은 도시가 아닌 듯 한적함이 있었다.

바르샤바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이런 건물과 골목. 다만 부다페스트가 좀더 건물 간격이 가까운 듯.

  날씨가 좋으니 좀 빽뺵하고 때가 껴 보이는 건물들의 윤곽이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마치 저화질에서 고화질로 업그레이드된 듯한. 사실 이 도시는 먼지가 좀 있는 편이다. 알 수 없는 뿌연 층이 항상 깔려있는 것 같던데 날이 맑으니 좀 덜해 보일 뿐. 이동이 잦지 않은 일정을 짠 날에는 왠만하면 많이 걸어다녔다. 상점의 모습, 체인점의 종류, 대형 쇼핑몰 입구의 모습, 지하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갔다 나오는 방식 같은 걸 보다보면 꽤 재밌다. 하지만 1일 교통권을 끊은 날에는? 좀만 걸어도 될 거리도 무조건 환승해서 다닌다. 버스에서 트램으로, 트램에서 지하철로, 지하철 탔다가 메트로버스로...

Kalvin 역 주변에 비건식당이 쪼로로 3개나 붙어있었다. 그 중 3번 정도 가서 먹은 892키친이 젤 맘에 들어.

  내 숙소는 지하철 Kalvin 역 주변이었는데 전메뉴가 비건인 식당이 3개나 연속으로 붙어있어서 끼니를 사 먹을 때마다 굉장히 행복했다. 세 곳 모두 훌륭했지만 가장 자주 간 곳은 오픈한 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892키친이었다. 먹고 싶은 만큼 뷔페식으로 여러가지 담고 그램수로 가격이 책정되는 곳. 구글 평이 살짝 안 좋은게 있어 걱정했지만 비건에 오가닉 메뉴, 맛있고 창의적인 메뉴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디 더 바랄게 있으랴. 직원들도 모두 젊고 잘생기고 예뻤다. 인테리어도 예뻐 오가는 사람들이 들어가볼까 말까 망설이게 하는 곳!

  아, 이거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물이 불쌍해서, 건강에 좋아서, 윤리적으로 찜찜해서 비건식당을 어렵게 어렵게 찾아야 하는 환경은 비건지향 생활자들을 유별난 사람, 어려운 사람으로 치부하게 되고 '그럼 식물은 안 불쌍하냐?' 하는 식으로 비웃으며 궁지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우리가 육식을, 아니 어쩌면 너무 과도하게 육식 필수 식단을 아무 생각 없이 먹듯 비건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비건도 있어야 한다. 내가 본 비건 식당 3개는 역 주변 메인 상가의 아주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나 오가다 들어갈 수 있는 곳. 아주 자연스럽게 누구나 한끼 정도는 비건지향자가 될 수 있는 환경.

  암튼 그 식당에서 3번을 먹자 직원이 얼굴을 알아보고 로얄티쿠폰을 주었다. 얼떨결에 받았지만 10번 정도 도장 찍으면 단일메뉴를 주는 것 같았고, 그리고 더 대박인 것은 학생이면 20% 할인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말 멋지지 않나.

부다성의 아경 조경을 위한 전력낭비

  부다성에 올랐을 때는 사람이 예상보다 안 붐벼서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렇게 높지도 않다. 성 앞에 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저께 갔던 Citadela 가 보여서 좀 놀랐다. 와, 거기가 훨씬 높다. 부다성 오르는 길은 계단도 별로 없고 잘 닦여있어 오르면서 코웃음을 쳤다. 사람이 별로 없길래 오른쪽 끝 쪽으로 쭉 걸어보았다. 국회의사당이 잘 안 보였지만 Virgin Mary 동상이 있어 도시 전경을 찍는데 또다른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너무 사람이 없다 보니까 좀 무섭기도 했다. 

드론만 저 동상의 앞모습을 볼 수 있겠지.

  Citadela 보다는 조금 낮았지만 앞을 가리는 나무가 없어 야경 찍기에는 훨씬 더 좋았던 것 같다. 엘지폰과 아이폰을 번갈아 가면서 찍어봤는데 빛이 부족할 땐 아무래도 아이폰이 훨씬 나은 것 같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내가 찍은 야경 중 괜찮은 게 몇 장 있어서 나중에 사진일기첩에 따로 올려보도록 하겠다.

S자 후크. 드디어 사다.

  여행용품 중 가장 유용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S자 후크이다. 많은 호스텔들은 대부분 뭔가를 넣거나 걸 공간이 없다. 아니, 공간이 있어도 옷을 걸 방법이 없다. 한 방에 닭장처럼 자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편의와 센스가 있는 호스텔은 아주 희박하며 있다면 다른 부분에서도 우수하기 때문에 평점이 월등히 좋다. 이 호스텔도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한 방에 6명이 자는 제일 저렴한 방이었기에 침대 공간에 저런 작은 보관함이 끝이었다. 한국에서 2개를 챙겨왔지만 러시아 호스텔 샤워실에 두고 온지가 어언 2달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 각 나라 마트나 생활용품이 보일 때마다 S자 후크를 찾아 헤맸지만 팔지를 않더라. 근데 여기 부다페스트에서 드디어 찾았다. 그리고 신나게 바로 이용했다. 역시나 옷을 빨아서 널고, 팬티를 걸고. 이 작은 것에 이렇게나 기쁘다.

숙소 주변 테스트코 옆 가게에서 발견. 김치보다 더 반가워서 소리지를 뻔.

  가만보면 적재적소를 난 참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장기여행자에게 복잡하고 화려한 것 필요없다. 간단하고 가벼운게 짱이다. 내가 추구하는 여행 방식? 삶의 방식도 비슷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