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나은 두번째 숙소에 머무르고 나서 그 다음날 든 생각은 '어두운 이 도시가 어떤지 모르겠으니까 밀린 일기를 쓰자' 였다. 나는 또 카페를 찾는다. 구글맵 평점이 정말정말 좋은 곳이었다. 내가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노트북을 챙겼다. 아마 여기에서 리투아니아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오마이갓. 안락한 소파, 전문적인 커피냄새, 손님에게 다양한 커피용품을 설명모습, 테이블 위의 예쁜 귤들, 각자 자기의 일을 토닥토닥 두들기는 손님들. 나는 그러면 안될 것 같았지만 주문 전에 가방을 놓고 얼른 긴 줄을 섰다. 나는 여기서 내 자리를 확실히 점유하고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아이스라떼와 케익을 시켰다. 콘센트에 노트북 전원을 연결하고 주위 사람들을 쳐다본다. 조용히 정말 자기 할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내가 시킨 것은 바리스타가 무려 자리로 가져다 준다. 내 집도 아닌데 이런 카페에 왜 이렇게 환장하는 지는 여러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런 공간은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에겐 물론이와, 공간비용이 부담스럽고 자기공간이 부족한 젊은 세대에게 커피를 마시는 순간 만큼은 내 공간이라는 충족감을 준다. 돈을 낸 만큼 서비스를 받고 전력, 음악, 적당히 독립적인 분위기를 누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 공간이란 없는 나 같은 여행객에게는 정말 소중한 곳이다. 케익도 직접 만드는지 내 입에 착 맞았다. 화장실은 지나칠 정도로 훌륭했다. 할 것을 다 하고 나오기 전, 귤을 하나 까먹으면서 이곳이 주는 센스를 온전히 다 가졌다고 느꼈다. 정말 간단하고도 좋은 센스이지 않나. 테이블마다 잎사귀와 함께 그득하게 놓인 귤 바구니.
본의 아니게 폴란드 리뷰를 카페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음. 어쩔 수 없었다. 이날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감이 그곳으로 이끌었고 날씨는 전날보다 훨씬 개어 밝은 풍경이었지만 슬프게도 해는 2시 반부터 지려고 시동을 건다. 사실 좀 아쉬웠다. 이렇게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그래서 구글맵을 다시 켰다. 친구가 '폴란드 가면 쇼팽이지! 꼭 보고 와' 했던 말이 떠올랐고 쫌만 걸으면 쇼팽동상이 있는 공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쫌이라는게 역시나 예상보다 먼 거리여서 좀 힘들었지만.
쇼팽동상을 찾아서 Lazienki 라는 공원에 입성했다. 하. 근데 이게 뭐람. 입구부터 어두컴컴했다. 나는 오른쪽 사진과 같은 공원 속에서 동상을 찾아 10분간 걸어야 했다. 들어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상이 있었지만 난 에둘러 가는 길에 들어가서 저 캄캄함을 뚥고 30분처럼 걸었다. 막상 보게 된 쇼팽동상은 별게 없었다. 거대한 쇼팽이 마술을 부리듯 앉아있었다. 내 힘든 발걸음이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온갖 허심탄회한 혼잣말이 다 나왔다. 내가 이걸 보려고... 불 좀 켜놓지... 아 진짜 뭐하는 거야 나.
지도를 다시 켜보니 이 공원을 좀더 헤매다 보면 현대미술관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저녁 8시까지 하는 곳이니 볼게 많아도 천천히 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왕 헤매는 것 더 헤매보자. 하하. 그렇게 나는 20분간 더 헤매야 했다. 정말이지 이 공원은 갖가지 작은 박물관과 동상을 보유하고 있지만 조명 따위는 없는 곳이었다. 24시간 열려있고 그 안에 방문객들이 올만한 미술관도 있으면서 산책길에 조명이 없다뇨.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길치는 구불구불한 공원길을 찾아 빠르게 걸었다.
천만 다행히도, 도착한 현대미술관은 나의 발걸음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마침! 이 날은 무료관람날이라고 지하층에 코트를 맡기고 바로 관람을 하라는 것 아닌가. 사실 아까 카페에서 여행 경비 정산을 또 하면서 박물관이랑 미술관 방문을 좀 선택적으로 해야겠다고 반성했었다. 식/교통/문화/주 이렇게 분류를 했을 때 관람료가 생각보다 많이 나갔던 것이다. 돈 없는 여행객 주제에 이게 무슨 복지폭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건가? 라고 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난 깨달았다. 무료관람날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때를 맞춰 방문하자!
그렇게 하나의 깨달음을 얻고 관람을 시작했다. 이날의 전시 주제는 과거 현대미술 작가들의 주요 전시물을 재배치하는 듯 했다. 그것은 잡지가 될 수도 있고 소리도 되고, 영상물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로서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는 사진이 하나 있었다. 작가는 오래 사겼던 남자에게 폭력을 당했고 폭력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저런 상태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수차례 수술을 해야했고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그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특히 어린 세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접하는 성애적 관계와 섹스의 이미지는 항상 긍정적이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전시회는 18세 이하 관람금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작가는 그것에 반대했다. 연애에 있어서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님을 교육적으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이 있는 관계에 사실은 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교육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데이트폭력이 만연한 한국에서 온 한국인은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서양은 로맨스와 섹스가 더욱 부추겨진다.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쿨하지 않다라는 분위기가 더 만연한 곳이다. 그 당시 그의 전시가 얼마나 쇼킹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퀴어 관련한 작품들도 꽤 있었으나 그닥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특히 게이를 표현하는 수단이 코르셋이 심하게 입혀진 여성의 모습을 답습한다는 점이 결국엔 여성혐오적이라고 느꼈다. 여성혐오를 해야만 게이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자신의 정체성일까?
사실 대부분의 박물관에, 미술관에 여성나체 동상이 참 많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많은 명작이라고 불리는 그림 중에도 특히 벗은 여자의 몸과 솜사탕같이 연약하고 부드러운 소녀의 피부를 표현한 것이 많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이다. 여성 몸에 대한 오랜 여성혐오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 작품들이 주르륵 나열되어있는 부분은 오래 관람하기 싫어진다. 코르셋이 없었다면 후대인 내가 보고 있는 작품 속에 더 많은 여성 전사와 군인, 우람하고 능력있어 보이는 여성 기술자를 더 자주 볼 수 있었을 거다.
아무튼. 뜻밖의 좋은 관람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저녁엔 숙소 근처 또 비건식당을 찾아 갔다. soysoy 라는 귀여운 이름의 태국음식점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다음날 점심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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