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사실 한 것도 별로 없는데 지나고 보면 자잘한 에피소드가 마구 쌓여있는 기분이다. 내가 가진 강박이란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줄 한줄 떠오른 생각들을 모두 기록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머릿속에 뒤섞여 쌓인다. 그러다 매일 일기를 쓰지 못한 것에 대해 한심함을 느끼며 갑자기 다른 전략을 세운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생각이 나는 것들만 적는 것이다. 전략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깨닫고 있다. 밖에 나가기는 죽어도 싫고 배고파서 뭔가 먹긴 먹어야 하는 날에, 냉장고와 찬장을 싹싹 뒤져 먹을 것을 추스려 배를 좀 채우게 되는 게을러 터진 최후의 방편이랄까.
어쩌면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차피 모든 것을 100퍼센트로 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할거고, 억지로 몇 일 한다 치더라도 곧 답답함과 그 규칙성에 몸살이 나버릴 것이다. 요약을 잘 못하는 사람은 드디어 요약하는 한가지의 방법을 깨달았다.(아니, 어떻게 모든 일을 기록하고 싶어하지. 나는 말 수가 적지만 속으로 하는 말이 많아서 뒤집어보면 굉장한 수다쟁이일 수 있다). 다만 이곳에 기록하는 일자와 실제 일어난 일자에 대한 갭을 조금 줄이면 좋을 것이다.
음.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숙소 주변에 괜찮은 비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그 다음날 프리워킹투어에 서둘러 가기 위해 점심을 또 거기서 먹었다. 오이와 땅콩으로 만든 솜똠이란 메뉴였는데, 시키고 보니 그건 에피타이저 메뉴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긴 좀 부족했고(왜냐면 정말 오이와 땅콩 외 다른 재료가 없다), 둘이 에피타이저로 먹는 다면 딱 맞을 양이었다. 하지만 난 시간이 좀 부족했다. 맛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10분만에 후딱 먹고 계산을 했다. 아, 나오기 전에 궁금했던 것을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여긴 폴란드의 비건 타이 레스토랑인데 왜 케이팝 노래만 트나요? 직원 중 한명이 팬인가요?" 어제부터 안면을 튼 직원이다. "음, 사실 아시아음식점이라서 여러 아시아 음악을 틀어봤는데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케이팝을 틀게 되었어요." 한다. 그리고 내가 비건지향임을 확인한 그는 바르샤바의 괜찮은 한식당을 추천해주었다. 아직 한국음식이 그리운 단계는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척 받아적었다. 근데 사람들이 케이팝에 대해선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니...? 특히 죄다 아이돌곡들이어서 띠용해지는 순간이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여파인가. 나중에 다른 폴란드 친구에게 들은 것이지만 미용 마스크팩이 굉장히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한국 것은 괜찮은 것, 들을만한 것, 건강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걸까? 바쁜 마음에 케이팝에 좋은 인디곡들도 많음을 알려 주고 싶었는데 깜박하고 서둘러 나섰다.
리투아니아에서의 프리워킹투어 경험이 좋았어서 이번에도 신청하게 되었다. 참가비란게 따로 없지만 투어가 끝난 후 자율적으로 내고 싶은 비용을 주면 된다. 이번에 만난 가이드는 유머코드가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말이 술술술 나오지는 않았지만 본인만의 유머를 중간중간 섞어가며 뒤로 갈 수록 재밌는 설명 방식이었다.
그는 바르샤바를 약간 까발리듯 소개를 해주었다. "여러분이 보고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사실 엄청 오래된 것이 아니에요. 여기 세계2차대전으로 90% 다 파괴되었던 곳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전후에 전쟁 전으로 되돌리자는 마음으로 100년 200년된 것처럼 재건을 한겁니다. 속지 마세요."
세상에. 이 나라 또한 '유구한 역사'가 건물에 다 녹아있구나 싶었는데. 그렇게까지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니.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을 것이다. 독일과 소비에트 통치 기간으로 뺏겼던 국민성을 되살리기 위해 이만큼이나 노력했다는 증거 아닌가. 한편으로 매우 슬프고 한편으론 훌륭한 건축의 역사인 것 같다. 박물관을 가면 전쟁으로 부숴져 가루가 되버린 옛사진을 볼 수가 있는데, 그렇게 없어진 자취를 다시 세운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분명 이 나라 사람들은 독립 폴란드라는 자부심이 높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비에트 통치 기간에 지어진 건물들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한다(대표적인 예가 Palace of culture). 그런 건물들이 인기 좋은 관광명소라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다.
어떤 건물은 안쪽에 광장이 있는 사방형 건물인데, 각 네면의 건축시기가 달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도시는 전쟁 후로 재정이 빈곤해서 아주 천천히 지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이 나라는 마냥 '엄연히 여기도 유럽!'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알면 알 수록 러시아나 독일에 대한 악감정이 스멀스멀 자라는 듯 하다.
프리워킹투어가 끝나자 나는 지독한 한기를 느꼈다. 하필이면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버스를 타야 했는데 걷기를 시작하는 멍청한 결정까지 한 것이다. 아직 구글맵에 배신감을 덜 느꼈던 때였던 것 같다. 결국 중간에 오들오들 떨며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띠링. 근데 카우치서핑으로 나를 재워주기로 한 Weronika(웨로 아니고, 베로니카)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베로의 친구들이 한국에 갈 예정인데 여행계획을 짜는데 도와줄 수 있겠냐는 문자였다. 오늘 그들은 크리스마스쿠키를 구울 예정이니 오늘 만나도 되고, 아님 내일 회의하는 날이니까 내일 봐도 된단다. 나는 달달 떨리는 몸을 녹이고 싶었기에 내일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몸을 잠시 녹인 후, 저녁과 군것질거리를 사기 위해 다시 나왔다. 이 축축한 한기를 다시 느껴야 하다니 괴로웠지만 워킹투어만으로 하루를 그냥 마감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고작 4시 50분. 해는 완전히 저버려서 밤 11시라 해도 누구든 믿을 것이다. 오늘로써 먹는 것이 하루의 큰 일과임을 더 크게 느껴버렸다. 슬프게도 첫날 이후로 완전히 관광지역에 있는 호스텔을 돌며 묵고 있어서 주변 식당이 모두 비쌌다. 하는 수 없이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한국엔 없는 기본 버거세트였던 것 같은데 상당히 괜찮았다. 게다가 날씨는 이래도 계속 걸었으니 갈증이 났는데 콜라를 들이키니 좀 살만해지는 것 같았다. 빠르고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 먹고 나서는 서둘러 Biedronka(비에드론카)라는 수퍼마켓으로 가서 추가 칼로리가 될 만한 것들을 샀다. 초콜릿, 주스, 메마른 빵(뵤카. 내 폴란드 최애템), 생수, 사과1개. 아. 이제 좀 마음 놓고 정말로 쉬러 숙소로 들어가자.
침대에서 사과를 씹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많은 걸 하려고 하지 말자. 천천히 가자. 지금은 겨울이고 다른 스타일의 추움에 몸이 적응해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에 많은 것을 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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