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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그다지 빠르지 않는 속도를 유지한다는 것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20. 2. 13.
  • 처음 생각한 날짜 : 2019. 12. 17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그다인스크로 가는 버스 안에서.
  • 생각을 푼 날짜 : 2020. 02. 12 불가리아 부르가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이 여행의 시작점이었던 러시아 모스크바로의 여정을 빼 놓고는 비행기가 아닌 육로 이동을 계속 하고 있다. 버스 아니면 기차다. 아무래도 계속 접경 국가로의 이동이라서 옆으로 옆으로, 아래로 아래로만 쭉쭉 가면 되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찾아보면 요즘은 비행기가 딱히 비싸지 않거나 오히려 싼 가격으로 나와 훨씬 빠르고 경제적으로 다닐 수 있겠지만, 나는 공항 수속 과정 자체가 번거롭게 느껴지고 공항에서 시내까지의 이동도 하나의 스트레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동 방법에서 비행기는 거의 생각하고 있지 않다. 탄소배출량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비행기는 내 시간과 돈을 아껴주므로 가장 합리적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것이 나에게도 가장 좋은 것일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굉장히 느린 육로 이동을 계속 하면서 드는 생각인데, 교통을 선택할 때 나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도 취할 수 있는 충분한 선택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행기 외 이동수단들, 특히 기차의 탄소배출량이 굉장히 적은 것이 놀랍다 (짤 출처 : http://www.bitsofscience.org/plane-or-train-planes-20x-as-bad-climate-per-km-6835/)

  육로 이동을 하겠다고 한 것은 어쨌든 가장 싸고 빠른 것은 제외하겠다는 의미다. 놀랍게도 2020년에도 기차와 버스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느린 교통수단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이 생각을 풀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유럽의 버스와 기차의 속도가 너무너무 느려서였다. 기차는 타면 탈 수록 느린 이유를 저절로 알게된다. 물론 빠른 기차도 있긴 하지만 아직 반 이상의 기차편들이 시속 30~40km 짜리들이다. 열차와 선로가 굉장히 오래되었으니 이해는 된다. 아무리 풍경 보기를 좋아해도 탈 때마다 이런 식이니 처음에는 그 구식이 신기했다가도 금방 '이 거리는 한국이었으면 2시간 전에 도착했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버스는 어떤가? 나는 대부분 신식 글로벌 버스회사인 Flixbus 를 타고 다녔는데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갈 때 빼고는 모두 버스의 상태가 좋았다. 차체도 새것 같았고 시트도 깨끗하게 청소되어있었으니 절대 5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하지만 버스의 속도는 톨게이트에서 요금 정산을 막 마치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차량처럼, 그다지 매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애매한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국경을 넘었다. 

  왜 이 나라사람들은(유럽국가들은) 이런 속도를 유지하는 걸까? 빨리빨리의 민족 한국인은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선로를 최신으로 교체하지 않고 왜 아직 몇 십년된 열차를 쓰고 있으며, 도로에 구멍이 많거나 차체가 구진 것도 아닌데 왜 더 쌩하고 달리지 않는 걸까. 이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 도나! 좀 더 빨리 달린다면 출장을 다니는 비즈니스인들도 더 빨리 움직여 더 많은 일을 하고 개인들도 친척집이나 본가에 갈 때 좀 더 많은 일을 하고 나서 출발해도 같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이거 환산하면 국가적으로 엄청난 수치 나오는 걸텐데? 이 나라들 발전이 덜 된게 이런 데서부터 다 이유가 있는거 아니겠는가. 장거리 수단들만 이런게 아니다. 도심의 트램과 버스들도 주행과 정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걸리는 시간 모두 느리다. 

  한국에서 나는 어딘가 좀 느리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남과의 약속은 잘 지키려고 하는 편이었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뭐든 여유롭게 하는걸 좋아하는 편이다. 빨리빨리문화를 지양하고 싶어하던 사람이었는데(쉽게 말해 한량과) 유럽을 다니니 내 안의 숨겨져 있던 그 K-DNA가 슬금슬금 존재감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너도 영락없이 한국인이라고.

  내가 모르는 도로 속도 규정이나 기반을 신식으로 바꿀 시에 필요한 경제적 규모 같은 건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속도여도 괜찮은 점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바르샤바에서 그다인스크로 가는 플릭스버스 안이었다. 차창 밖을 보면서 폴란드 시골 풍경은 참 예쁘구나하고 생각한다. 음, 풍경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군. 한국이었으면 고속도로에서 경쟁하듯 달리느라 멀리에 있는 큰 건물들만 관찰할 수 있었겠지. 기사님을 본다. 운전하는 기사님 외에 한명의 직원이 또 있는데 2~3시간에 한번씩 교대를 한다. 저 기사님들은 한국의 버스기사님들보다 훨씬 근무환경이 좋구나. 졸릴 때면 항상 짝으로 다니니 앞좌석에 앉은 한명이 말을 걸곤 하겠군. 버스 안에서 소동이 났을 경우에 한 명은 사태를 파악한 후 상황을 정리하겠고 한 명은 계속 운전을 할 수 있겠구나. 참, 속도가 느리니 교통사고율도 훨씬 줄어들겠지. 이따금씩 회전로에서는 시동이 푹 꺼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갈 때도 있다. 그래서 독서를 하는 승객들도 종종 보인다. 나도 태블릿으로 책을 읽기도 했고 심지어 미니데스크를 펴고 드로잉북에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하차를 해서는 이런 생각이 문득 든다. 허리가 멀쩡하네? 2시간 이상 지방 가는 버스를 타면 항상 허리가 아작나곤 했는데. 종아리와 발이 부은 것만 빼고는 그렇게 허리가 잘못된 느낌이 없다. 

  위에 적은 것들은 한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느리게 가는 버스의 장점이라고 하기엔 글쎄. 써놓고 보니 어쩌면 당연히 그래야 할 모습인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창 밖을 보면 풍경을 감상하고 싶어하는 게 사람이고, 몇 십명을 한꺼번에 책임지고 이동시키는 기사의 정신적, 물리적 안녕은 필수일 것이며 교통사고는 없을 수록 당연히 좋다. 앉아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뭔가를 먹고 보고 싶어지므로 가끔은 그럴 수 있어야 하고,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깔작일 수도 있겠다. 몇 시간씩 이동했다고 해서 남은 하루를 불편한 몸상태로 지내고 싶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다.

  느린 이동의 장점이라기 보다는 느린 이동이 주는 가능성이라고 보는게 맞는 것 같다. 비어진 공백이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게 아닐까. 정해진 것은 없다. 그 시간과 에너지와 공간을 활용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 공백이 있기에 심하게는 이동 중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확률을 확 낮춰주는 것이라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나는 느린 이동을 하면서 안전함을 느낀 것이다.

  한동안은 그게 안전한 느낌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좀 그 속도에 벙찐 기분이었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금껏 모든 대중교통은 속도를 제일 중요시했다. 내가 살던 나라는 커다란 짐을 들거나, 아이를 동반하거나, 노령으로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탈 때에는 인간적으로 그들이 안전하게 착석하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얼른 문이 닫혀 출발하기만을 고대한다. 결국 그들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문은 항상 빨리 닫혔으며 급출발을 했다. 멀리서 뛰어오는 승객은 종종 탑승에 실패한다. 기사는 배차간격에 시간이 쫓겨 그를 못 보았을 수도, 보았어도 출발해야만 했을 수도 있다. 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해 방광염에 걸린 기사들은 정말 흔하며 장시간 운전으로 몸이 망가지거나 심지어 급사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창 밖을 볼 만큼 식별 가능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이동시간 자체는 이제 모두에게 죽여야만 하는 무의미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뭘 보기도, 펼치기도 참 애매하고 불편해서 잠이나 자는게 가장 낫다.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교통을 선택할 때 합리적이지 못한 것도 취할 수 있는 충분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가? 누군가는 꼭 그러겠지. "너가 지방을 잘 안 다녀봐서 그런가 본데 아직 무궁화호랑 새마을호 기차 많아.", "너는 시간이 참 많은가 보구나." 아직 비교적 느린 기차가 존재하고 내가 한량인 점은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교통 수단이 느린 것은 점차 폐쇄하고 빠른 것으로 교체하고 있기에, 빵빵한 배급사를 통하지 않는 인디독립예술영화들이 영화 상영관에 사람이 몰리지 않는 오전과 새벽시간에만 희미하게 상영되듯 그나마 저렴하고 느리며 작은 역을 가는 기차는 점점 찾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모든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판매된다지만 우리의 이동할 권리 속에 느리게 가도 될 권리도 과연 있는 걸까.

  가능성은 그러고보니 공백의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남들보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자격증을 두루 '갖춰야' 좋다고 하는 기업에 입사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식으로 항상 따로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었는데. 뭔가를 하지 않음으로써(속도를 올리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가능성들이 굉장히 탐난다. 속도는 보통 우위를 비교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므로 게임의 시작부터 금은동메달을 양보하겠다는 것은 분명 빠름 너머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언젠가는 빠르지는 않지만 멋진 풍경을 볼 수 있고 편안하며 안전함을 추구하는 열차나 버스가 희귀해서 비싼 값에 팔릴 지도 모를 일이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타면 되겠지. 하지만 그게 과연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전에 기본적인 가능성과 권리를 제대로 담아 모두에게 안전한 대중교통을 유지할 순 없는 걸까?

 

우리가 여전히 풍경을 천천히 보면서 다닌다면 어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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