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

루마니아 - 나의 부쿠레슈티 세이버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20. 2. 20.

(자꾸 스크린세이버가 생각나서 제목 고민함) 

 

  어떡하지? 이 도시 나랑 안 맞는 것 같다. 이미 다른 도시에서 단물(?)을 빨고 와서 그런가 관광욕구가 전혀 일지 않았다. 하지만 한 줄기 빛과 희망처럼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만나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돌고래, 루마니아에서 일하는 내 친구 P 만나볼래?"

  라고 루마니아 입국을 알리자 친구 K가 제안을 했었다. 오, 안 만날 이유가? 절친의 친구인데(직장동료였음) 게다가 한국인이라니. 도저히 안 만날 이유가 없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떠나면서 중국인조차 보기 힘든 이 진짜 동유럽에서는 호스텔에서 '오 한국인이시네요!' 하면서 짧은 한국말조차 할 기회가 전혀 없어서 점점 외로워지기도 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런게 있지 않나. 절친의 친구라면 나와도 어쩌면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느낌, 적어도 요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 카우치서핑과는 또 다른 모르는 사람 만나기였지만 그래도 지인의 지인은 반의 반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 아니겠는가.(뭐지 나를 1로 보고 내 친구를 0.5로 보고 뭐 그런건가?)

  

루마니아 민속주택 박물관엔 이쁜 집이 엄청 많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그나마 가 봐야지하고 지도에 저장해뒀던 한 군데를 들렀다. 씨기가 루마니아 전통 주택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줘서 흥미롭게 표시를 해두었지만 겨울이라 구경하는 게 수월할까? 닫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조금 있었다. 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호수와 강이 있는 곳이었고 구경을 마치고 P와 만나기로 한 식당까지 도보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딱 괜찮겠다 싶었다. 

초딩 때 좋아했던 집만들기 모형교구가 생각났다

  박물관의 입구는 흡사 모르고 들어갔으면 그냥 공원입구인가 싶을 정도로 썰렁하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나 직원이 조용히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각 지방에서 발견된 독특한 집의 형태들이 입구 지도에 대략적으로 정리가 되어있었지만 글씨가 너무 작아 읽는 것을 포기했다. 공원 전체를 쭉 걸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하나의 마을 처럼 구성되어있어 드라마 촬영지를 보는 느낌도 들어서 재미있었다. 다는 아니었으나 간혹 방 안 까지 문을 열고 들어가 집안을 둘러볼 수 있는 집들도 있어서 점점 흥미로워졌다. 

  cctv로 누군가 날 보고 있었다면 저 애 혼자서 뽈뽈거리면서 되게 잘 보네 싶었을 거다. 집이 정말 정말 많았는데 최대한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고 보려고 구불구불 구성된 길을 엄청 왔다갔다했다. 방문객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있으니 한 5명 정도 본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의 정기 방문객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 양! 이!

  고양이들이 몇몇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사는 아이들인 것 같았다. 방문객이 아무래도 다른 계절보다 훨씬 없어서 그런지 손길을 기다렸던게 분명하다. 나를 졸졸 따라오기도 하고 다리를 빙빙 돌면서 털을 잔뜩 묻히는 아이도 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집 계단을 오르다가 만나면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반갑기도 했다. 나도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영상을 찍었는데 '어이구 우리 슨생니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둥기둥기.

석양보다가 갑자기 현타가 와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짐

  강변에는 물레방아 하우스, 보트하우스들도 많았다. 5시가 다 되어 박물관 폐장시간이 다 되어 그 쪽은 대충보고 말았지만 최대한 많이 본 것이라 아쉽지는 않았다. 입구와 반대편으로 나가자 내가 딱 생각한 그 코스로 빠져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시민들이 퇴근 후 연인들끼리, 가족끼리 이미 많이 걷고 있었다. 한국에서 종종 걷던 천변이 생각나고, 그 때 걸으면서 많이 했던 생각과 고민들이 새삼 두둥실 떠올라 석양을 보면서 감상에 젖기도 했다. 사실 P와 만나기로 한 식당까지는 금방 갈 수 있어서 충분히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나처럼 석양을 보면서 생각에 젖은 채 서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위를 늘려 먹어보아요

  우리는 강변의 Zaitoone 라는 레바논 음식점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내가 어중간하게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 맞춰서 P가 정해준 곳이었다. 가격은 높으나 가끔 회식 때 오는 곳이라며. 짧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가 계획적으로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 치고는 수다를 잘 떨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만나게 된 공통분모가 있으니 J에 대한 이야기, 이 셋이서 서로가 알게 된 계기부터 에피소드까지. 그리고 나의 여행이야기까지. 모르는 사람이랑 이렇게 수다를 떨 수 있다니 내향인은 성취감도 들고 이래저래 매우 기뻤다.

  P는 집까지는 걸어갈 수 있다며 내가 타야할 지하철까지 데려다주며 "우리 집에서 하루 잘래요?" 급제안을 해주었는데, 표현을 잘 했나 모르겠는데 어찌나 고맙던지. 아! 부쿠레슈티가 조금 다르게 기억될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한편으론 매사 꼼꼼한 그가 내가 어디서 묵고 있는지, 언제까지 이 도시에 머물 것이고 뭘 먹고 다니는지 물어보다가 이 녀석 제대로 다니는 거 맞아? 내일 모레 묵을 호스텔도 아직 안 정했다고? 하는 생각에 도달하여 답답함에 제안한게 아닐까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아 조금 한량과구나~" 하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한 번에 간파할 수 있나.

처음으로 재미없는 워킹투어를 들어서 난감했음

  그래서 나는 다음날 숙소에서 짐을 빼고 더이상 다른 숙소를 알아보지 않은 채 워킹투어를 느긋하게 듣고 그의 집으로 갔다.

무려 냉이된장국

  그의 집까지 가는 길은 조금 험난했지만(구글이 어려운 길을 알려줌) 도착해서는 드디어 천국에 왔다고 농담할 정도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P가 직접 저녁밥을 해주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에서 직접 캔 냉이를 말려 보내신걸로 된장국을 해주었는데, 하. 음식 하나에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이 이게 바로 조국 음식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꽁치라고 해. 너가 맘에 들어.

  P가 키우는 강아지 꽁치가 나를 무척 좋아해줘서 동물러버는 그저 행복할 뿐. 서로 뒤집어지게 좋아하는 사이는 흔하지 않다고. P가 말하길 얘가 그렇게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그래서 더 특별한 느낌.

개감동한 나

  그렇게 0.25정도 아는 사람은 이제 진짜 아는 사람이 되어 친해지게 되었다. 그가 내준 거실의 카우치는 친구 J가 와서 침대로 썼던 적 이후로 한 번도 펼친 적이 없어서 잠시 애를 먹었지만 곧 터득하여 꿀잠을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