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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루마니아 - 부쿠레슈티안과 함께 동서남북 누비기

by 그림그리는돌고래 2020. 2. 20.

  "돌고래, 내일은 뭐 할거에요?"

  아무 계획이 없었던 나는 정확한 답을 못하고 글쎄요라고 어정쩡하게 말을 흐리면서 조금 창피해졌다. 마치, 돌고래는 커서 뭐가 될거에요? 같은 질문에 뚜렷한 답을 하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쭈뼛거리게 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냥 저는 돌아다녀요. 그냥 걷고... 사람 구경하고요 또 걷고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으나 P는 금방, "아 한량과구나~ 나랑 반대네." 캐치하고 우리가 내일 할 만한 것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당시 필요했던 물건을 살 방법, 불가리아로 빠져나가기 위한 차편 등까지 나간 김에 해치워야 할 일들을 포함해서 동선을 짜고 예약을 해주셨다. 

드디어 찾은 닥터브로너스 올인원 클렌저

  새 아침이 밝고 P가 모카포트로 만들어준 커피로 카페인을 빠방하게 채우고 처음 간 곳은 근처 마트에 있는 약국 들리기였다. 여행와서 크게 후회를 했던 것은 닥터브로너스 올인원 클렌저를 써보지 않고 출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 D가 써보라고 미니사이즈로 줬었는데 안 써보고 왔던 것. 만약 써 봤다면 이게 얼마나 만능이고 짐까지 줄여주는 착한 제품이란걸 알고 올리브0에서 사서 출발했을 것이다. 자연 생분해성 재료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빨래와 양치까지 할 수 있는 백팩커에게 최강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오지 않은 것을 엄청 후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외국 것이니 외국에 가면 당연히 구매하기 쉽겠지하는 생각은 완전히 틀렸었다. P는 인터넷으로 구매처를 휘리릭 찾아보더니 여기 가면 있겠네 하고 우리 일정의 첫번째로 데려가주었다. 저 중간사이즈는 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P도 치약을 하나 사고 빠져나왔다.

차우셰스쿠 저택

  부쿠레슈티의 명물 인민궁전에는 별 흥미가 없음을 안 P는 차우셰스쿠저택 관람을 예약해놓았다. 메일로 예약 확정을 알림받아야 했는데 늦게 답장이 와서 하마터면 P도 나도 그닥 땡기지 않았던 인민궁전으로 갈 뻔 했다. 약국에서 클렌저를 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소까지는 조금 걸어가면 되었다. 

펠레슈성처럼 가이드를 통해서만 관람할 수 있다

  차우셰스쿠 저택은 그의 가족이 살았던 집이다. 이 도시의 못생긴 건물들을 지은 사람이 맞는가 싶게 여느 권력자처럼 호화 인테리어로 집을 꾸며놨다. 그의 집권이 끝나는 날 헬리콥터를 타고 도시를 도망쳐나갔다고 하던데, 시민들은 이 집을 습격해 물건들을 훔치고 부수긴 했어도 크게 해하진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신발 보호망을 신고 각 가족구성원들의 방을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딸의 방, 아들 방, 손님방, 그리고 치료실, 수영장, 사우나 등등 럭셔리 그 자체였다. 공기 정화를 위해 세라믹 타일로 꾸민 집 안 곳곳의 작은 분수가 인상적이었다. 작년 부터인가 갑자기(사실은 사연이 있음) 타일에 꽂힌 나는 각 방과 복도에 특징있게 깔린 타일 바닥과 벽에 눈이 갔다.

꽃무늬좀 벗어나고 싶지만 바닥타일에 꽃무늬는 너무 이쁜 것 같다

  우리는 호화스런 집 구경을 마치고 배가 고파 점심을 먹으러 버스를 타고 쇼핑몰에 갔다. 이미 꽤 많이 걸은 우리는 당이 뚝 떨어져 말을 잠시 잃었지만 그가 데려가 준 곳은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좋은 곳에 속하는 것 같아 잠시 해방감이 들었다. 윗층 푸드코트는 유리 천장과 식물들의 조화로 앉아서 먹고 시간을 보내기에 굉장히 적합했다.

그래. 건물이 유리벽으로 온실효과를 보려면 이 정도 채광은 되야지.

  건물의 크기도 큰 축이었지만 자연 채광을 잘 살리고 공적인 공간을 잘 살려 지은 것 같았다. 아마 혼자 쏘다녔다면 이쪽 동네는 와볼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우리는 중식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바로 옆에 이어진 공원으로 나가 햇살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가 각자 달달한 음료 하나씩 들고 나가 걸으니, 아 이게 주말의 여유였지하고 오랜만에 정상 생활의 바이브에 끼어든 것 같았다. 날씨는 완전히 풀려 패딩을 잠시 벗어도 괜찮을 정도였다. 비유를 하자면 잠실의 석촌호수같은 느낌이었다. 호수를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 나들이를 온 가족들, 기타케이스를 펼쳐놓고 라이브연주를 하는 사람들. 

  우리는 거기서 나의 짧은 머리에 대해서, J와 P가 같이 일하면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일 내가 불가리아로 넘어가는 기차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북쪽역으로 가 티켓구매까지 마쳤다. 이날 저녁은 내가 반찬을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맛있게 되지는 않았으나 P가 맛있게 먹어주었다. 요리 조차 나는 남아있는 재료로 즉흥적으로 섞어 만드는 타입이고 P는 모든걸 계획있게 맞춰서 만드는 타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청 걷기도 걸었지만 반대 성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P가 신경을 무지 많이 썼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우리 오늘 2만보 넘게 걸었어요! 하면서 카우치에 폭 쓰러진다. 지도로 보니 정말 우리 많이 걷긴 했다. P의 집은 부쿠레슈티의 북쪽에 위치했고 차우셰스쿠저택은 약간 중간쯤, 쇼핑몰과 공원은 동쪽에, 기차역은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근 후와 주말엔 주로 공부하거나 꽁치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 챙겨주느라 에너지를 쓴 P에게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맥주타임을 가지며 각자의 미래, 하고 싶은 일, 야망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었다. 얘기를 할 수록 진심으로 그의 진로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응원하게 된다. 해보지 않았던 분야를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해도 그것이 재밌어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지.

떠나는 날 해주신 팥 팬케이크! 커피와 상당히 찰떡이었음

  다음 날 내가 떠날 때 버스표가 없는 나를 배려해 같이 지하철역 부근까지 버스를 타주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보게 될 때, 또는 언젠가 나라에서 또 보게될 때 이렇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은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또한 머릿 속에 회색도시로만 남을 뻔 한 이 시간들을 알차게 채우게 되었다. 사람들 덕분에 여행이 이렇게 되었다가 저렇게도 되는 것이 참 신기하다. 여전히 나는 새로운 사람 만나기가 항상 두려운 내향인이지만 만나는 사람에 따라 도시의 분위기와 내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걸 매번 깨닫는다. 

  루마니아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난다. 매 도시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국가여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한 번은 좋은 계절에 친구들과 캠핑장비를 챙겨 가보지 않은 지방 도시들도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