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가족의 잔상이 오래 남아 해가 저버린 저녁에 기차에서 내린 후 숙소까지 약간 쫄은 상태로 걸어갔다. 대중교통에 대한 정보도 없고(유심이 없는 상태) 누군가에게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어서 20분 정도 숙소까지 한산한 도로 옆을 걸어갔다. 하루 종일 기차를 타는 날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근처 리들(Lidl)에서 대충 사과랑 빵을 사서 먹었다. 사과를 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아침이 되니 전날까지 꽉 차있던 불안이 해소가 되었다. 불가리아는 분명 유럽 내 최빈국 답게 수도 소피아마저 규모가 작고 오래된 느낌이 났지만 사람들이 친절하고 물가도 쌌다. 오랜만에 상쾌하게 아침 워킹투어도 들었다. 가이드는 본업이 연극배우인 사람이었다. 외모도 독특했고 말빨이 재치있어 좋았다. 투어가 끝나고서는 가이드가 추천해준 지하철역에서 점심도 해결하고 유심칩도 저렴하게 구매했다.
불가리아는 아무래도 터키와 접해있어서 그런지 모스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피아는 교회와 성당과 모스크가 동시에 있는 희한한 도시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집시의 수도 확연히 늘었다. 처음에는 기차에서 본 그 가족이 자꾸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워낙 많고 끈질기게 아이들을 이용해서 돈을 갈구해 잘 쳐내야하지만 이내 무덤덤해졌다.
소피아는 올드타운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계획된 도시 같았다. 대부분의 주 볼거리는 도보로 다 해결이 되었다. 하루를 혼자 헤매니 오래 머물 필요는 없는 도시 같아서 그 다음날 소피아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릴라수도원(Rila Monastery)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여행사를 끼고 편하게 다녀오는 방법도 있었으나 가격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도원을 가는 버스,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가 하루에 딱 1대씩이어서 아침일찍 숙소 체크아웃을 해놓고 트램을 타고 남쪽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하지만 뭐가 그리 긴장되었던건지 기상시간을 1시간 일찍 잡아버려 터미널에서 수도원으로 가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려야했다. 플랫폼번호까지 다 파악하고나서 20분 후면 가겠지? 하고 벤치에 딱 앉아서 시계를 보니 아침 9시도 안된 시각이었다. 버스 출발은 10시 40분인가 그랬는데. 이 멍청함에 혼자 허탈하게 피식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마트가 있는 곳 쪽으로 걸으니 거주단지가 나왔다. 대충 둘러보다가 주민들이 줄을 서서 사먹는 빵집이 있길래 나도 아점겸 피자 한쪽을 사서 먹었다. 손바닥 2개를 합친 크기가 1200원도 안되었고 방금 구웠는지 아주 따땃했다. 이때 먹고 저녁 7시까지 식사를 하지 못했다.
수도원으로 가는 버스는 정말 미니버스였지만 관광객을 꽉 채워서 출발했다. 2시간 정도 가면서 유럽인들은 지네들끼리 알아서 친해졌다. 이탈리아인들과 스페인들이 주였는지 서로의 언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도 쪼금 아는 스페인어를 써서 말을 끼어들어볼까 싶었지만 금방 그 생각은 접혔다. 중간에 30분 정도 기사의 점심시간 때문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들 담배를 쉼 없이 피어댔다. 이때부터 두통이 심하게 느껴졌다.
수도원은 릴라산 중간에 위치해 있어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버스를 탈출하고 나서는 드디어 신선한 공기를 한껏 마실 수 있어 좋았다. 내렸던 눈이 윗층에서 투둑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방문객들을 반겼다. 사람들도 일제히 흩어져 수도원 곳곳을 구경했다. 나도 수도원의 공간을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지 윗층을 구경할 순 없고 바닥층만 둘러볼 수 있었다. 한 바퀴 본 다음에는 이제 담은 2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나만 그런것이 아닌 것이 모두들 수도원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쪽 문으로 나가 산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 다 녹지 않은 살얼음을 사그락사그락 밟아가며 숲속으로 걷는 기분이 좋았다. 아직 장작을 쓰는 가정과 미니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준비해놓은 도끼질된 나무 무더기가 보기가 좋았다. 정상에서 흐르는 듯한 물줄기도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세차게 흐르는 모습도 좋았다. 하지만 시냇물을 보고 돌아서자 진짜 할 것이 없어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 괜히 기도공간에서 멍을 때리기도 했다(내부는 촬영금지였다. 하지만 몰래몰래 찍는 사람들이 보였고 실제로 어떤 한국 블로거가 엄청 찍다가 걸려서 퇴장당했다는 글을 보았다. 사진 찍는 사람이던데 제발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수도사가 나를 엄청 주시했다).
이 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가 무교인인데 종교적인 관광지는 굳이 힘들게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름 수도 옆으로 곁다리 여행을 시도한 것이지만 왕복 4시간의 거리는 부담되는 시간이었다. 유네스코 문화재라는 것 빼고는 그닥 감흥이 오지 않았던 곳, 이게 결론이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도원에 미리 신청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니 나쁘지 않은 곳이다(마치 절에서 사람들을 받아주는 것처럼). 나한테만 의미가 없었을 수도? 참, 릴라산에 7개의 호수가 있어 하이킹과 캠핑을 하기 좋다고 하던데 구미를 당기는 곳임은 확실하다. 아무래도 또 계절 탓을 해보기도 한다.
5시경 시내로 돌아와 숙소에서 짐을 찾았다. 이틀 간 카우치서핑을 또 하기로 되어있어서 호스트와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았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어서 힘들게 만났다. 결국 나는 30분 정도 늦어 호스트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호스트에게 소피아에서 더 할 만한 것을 추천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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