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흑해를 보기 위해서 루마니아에서 콘스탄차(Constanta)라는 해안도시를 갈까 했었다. 그곳에서 불가리아 바르나나 부르가스로 국경을 넘는 방법도 있었지만 나중에 터키로 진입할 때 소피아를 안 거치고 가자니 찜찜하고 거리도 너무 멀었기에 소피아를 먼저 간 것이었다. 그리고 부르가스를 안 거치고 바로 플로브디브에서 터키로 들어갈까도 고민했었다. 터키에서도 흑해는 볼 수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터키는 당시에 내 머릿속에서 굉장히 복잡터지는 나라였기 때문에 여유있게 바다를 만끽할 수 없을거란 예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딱 맞았고 부르가스의 흑해를 본 나는 여행의 속도를 확 늦추게 되었다. 총 9일을 이 도시에서 보내게 된다.
2박 3일을 예약했던 숙소는 키친겸 거실공간에서 노트북작업하기에도 쾌적하고 맘에 들어 4박 5일이 되었고, 매일의 일과는 '바다를 보고나서 괜찮은 한 끼의 식사를 하고 돌아온다!' 라는 간단명료한 미션만이 있었다. 비성수기 뿐 아니라 부르가스 자체에 돌아볼 만한 관광명소는 철새관찰구역이나 큰 호수 2개 정도 뿐이었어서 딱히 관광을 한 건 없었던 것 같다. 시내는 아주 깔끔하게 바닥이 닦여있었고 관광객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래가지고 장사가 될까 싶은, 번잡함이 낮은 분위기였다. 음. 딱 내가 원하는 편안한 작은 도시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도시가 죽은 것은 아니고 모든 가게는 현지인만으로도 충분히 굴러갈 정도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성수기를 대비해 새로 오픈하고 있는 가게도 꽤 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오래된 느낌이 없는 도시였던 것 같다. 진심으로 길을 걷다가 부동산이 보이면 유리문에 붙은 매물들을 살펴보면서 여기서 이런 아파트 살려면 얼마나 드나 본격적으로 알아보고 싶었다. 바람이 굉장히 불긴 했지만 매일 햇살이 따사롭고 있을 거 다 있는데 거기에 흑해까지 있는 곳.
부르가스에서 시간을 천천히 보낸 이유는 터키에 대한 두려움이 또 한 몫을 했다. 터키는 어딘가 굉장히 복잡하고 시장통일 것, 아웃 오브 유럽이니까 뭔가 다르긴 다를 것이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더 위험하고 이상하고 적응시간이 많이 필요한. 터키를 가로질러 조지아를 가겠다는 계획을 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흑해에서 강풍 바람싸다구를 매일 맞고 마치 사연있는 사람마냥 천천히 해안을 걸으며 한 생각은 '이제 반정도 온걸까. 터키를 다녀오면 그 땐 정말 반을 끝낸거겠지?' 였다. 내게 터키는 너무 큰 나라여서 하나의 고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담 부담 부담! 그런 의미에서 이미 3번째 도시에 와있는 이 불가리아라는 나라는 얼마나 이제 편안하고 안전한 나라인지. 약간의 경험 차이가 이렇게 큰 태세 변화를 하게 하다니 참 신기하다. 뭐든 부딪혀 보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말,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란 말이 딱 맞다.
호스텔에서 일기를 써야지 하면서 저녁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서는 오랜만에 유투브를 켰던게 생각난다. 결국 글 하나 못 쓰고 밀린 영상들을 정주행했는데 잊고 있었던 소소한 행복포인트라 그때 무척 뇌가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유투브를 보면서 낄낄대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완벽히 확보되었을 때만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내가 행동을 구분하고 참고 있었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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